오늘 본문에 ‘아름다우니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19절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했습니다.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 주인에게 순복할 때입니다(18절).
당시 노예제도가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라 하더라도 베드로가 보기에 아름다울 때는 주인에게 순복하고, 또 선하고 관용하는 자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에게도 순복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제도가 ‘옳다’ ‘아니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라고 할지라도 까다로운 주인에게라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복할 때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기를 힘쓸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될 때가 언제였습니까. 100세 되어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 장작을 펼쳐 놓고 그 위에 아들을 올려놓을 때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성도가 아름다울 때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참을 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또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만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운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하면서도 열린 하늘을 바라보고 천사와 같이 환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참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장엄한 순교를 할 수 있었을까. 어떤 고난이 있고 오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너희도 예수님을 좇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너희에게 본을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입고 있는 옷, 그 값에 따라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내면적인 것으로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말을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아름다운 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백성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대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창만 목사(남양주 록원교회)
[오늘의 설교] 성도가 아름다울 때
입력 2014-12-10 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