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셋, 시각장애인 눈 된다

입력 2014-12-08 03:12
한 실험 참가자가 시각장애인용 헤드셋인 ‘더 보이스(The vOICe)’를 끼고 태블릿PC를 조작하고 있다. 사용자는 헤드셋 전면에 부착된 카메라가 포착한 시각신호에서 변환된 음향신호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파악하게 된다. 영국 바스대학 홈페이지

60대 남성 A씨는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 않게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계단 앞에서부터 도처에 놓여 있는 장애물들을 피해 간 그는 테이블 앞에 도착해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마치 공상과학(SF)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A씨가 아래층에 있는 와인 병을 집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쓰고 있던 헤드셋 덕분이었다. 이 헤드셋은 영국 바스대학 연구진이 시각장애인도 앞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현재 임상시험 중인 기기인데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더 보이스(The vOICe)’라 불리는 이 기기는 헤드셋에 부착된 카메라로 포착한 시각 이미지를 소리나 진동 주파수로 변환해주는 장치다. 가운데 대문자로 된 세 글자는 “오 보인다(Oh I see)”라는 뜻을 담고 있다.

원리를 살펴보면 우선 카메라가 포착한 전경은 이미지 파일 형태로 곧장 내장 소프트웨어에 전달된다. 이 소프트웨어는 해당 이미지를 음향 신호로 변환해 매초 단위로 헤드셋으로 전달한다. 신호는 ‘삐’ 소리나 윙윙거리는 소리, 호각소리 등 다양하다. 밝은 색깔의 물체를 접하면 이 음향 신호는 더 커지며, 대상 물체가 시야의 위쪽에 있는지 아래쪽에 있는지 여부도 진동의 주파수를 통해 전달된다. 임상시험 결과 한 시간 정도 연습 과정을 거치면 음향신호 등을 통해 자신의 눈앞에 어떤 전경이 펼쳐져 있는지 사용자들이 상당 부분 파악하게 된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뿐만 아니라 이 헤드셋은 선천적인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후천적인 시각장애를 앓는 이들에게도 효과가 있다. 특히 시각장애를 개선하기 위한 인공 망막 시술이나 줄기세포 이식 등 외과시술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 수술 이후에도 시력 회복에 1년 가까이 걸리지만, 이 헤드셋을 사용하면 즉각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클 프루 바스대 교수는 “임상시험에서는 심지어 이 헤드셋을 끼고 글자를 읽는 사람도 있었다”며 “시각장애를 앓았던 사람들이 외과시술 후에도 글자를 명확히 구분할 만큼의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것에 비춰보면 놀라운 성과”라고 설명했다.

가디언은 영국 공학·자연과학 연구위원회(EPSRC)의 후원을 받는 이 헤드셋 기술이 상용화되면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획기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의 시각장애인은 2억9000만명이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