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을 통과했다고 생각할 때,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난다. 드라마 ‘미생(未生)’의 신입사원 장그래를 보라. 검정고시 출신인 그가 상사에게 내세운 건 ‘노력’이었다. 내 노력은 다른 사람과 양과 질이 다르다고. 장그래는 그 노력과 특유의 통찰력으로 문들을 차례로 통과했다. 인턴에서 사원으로, 신입사원이면서도 사장에게 주목받는 존재로.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계약직이다. 상사로부터 ‘더할 나위 없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지금 이대로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냐는 물음에 상사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장그래는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드라마가 아닌가. 아마도 현실에선 불가능할 활약과 성과로 사장은 물론 시청자들도 사로잡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원하면 계약직이라는 족쇄가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드라마 주인공은 극소수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은 600만명에 이른다. 전체 노동자의 30%가 넘는 규모다. 외환위기 때 양산돼 10년 이상 고용시장의 예비군 역할을 해왔다. 급여를 비롯한 처우는 열악하고 열심히 일해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대기업 계열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장그래는 비정규직에선 최상위권에 속한다.
방치하기엔 너무 큰 문제인 만큼 역대 정부마다 나름의 해법을 내놨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최근 정규직을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정규직이 과보호를 받다 보니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기업이 겁이 나서 정규직을 못 뽑는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일부 대기업과 공기업 노조는 흔히 ‘귀족노조’로 불린다. 같은 노동자인 비정규직의 이익엔 무관심하면서 자신들의 월급과 고용 안정성을 지키려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시장 경직성을 이들 탓으로만 인식한다면 방향이 틀려도 한참 틀렸다.
지금의 뒤틀린 노동시장의 바탕엔 ‘공급 독점’ 구조가 깔려 있다. 대부분 산업을 대기업 몇 개가 독과점으로 장악하고 있다. 물건이나 서비스 공급은 물론 고용도 이들이 좌지우지한다.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말단직원도 경쟁사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삼성이나 LG의 최고경영자, 혹은 임원이 몸값을 높여 스카우트됐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기업 입장에선 자유경쟁일지 몰라도 장그래, 혹은 전문경영인인 최고경영자에게도 한국의 노동시장은 유연하지도 않고 자유경쟁도 아니다. 미국의 인터넷 기업 야후는 2012년 경쟁업체 구글의 설립 멤버인 마리사 메이어를 새로운 CEO로 영입했다. 반면 정보기술의 전설인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만든 기업에서 퇴출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장그래 같은 비정규직은 물론 ‘오너’나 대주주도 잘못하면 언제든 퇴출당할 수 있다. 이런 구조와 문화가 있기에 미국의 노동시장은 유연한 것이다.
최 부총리는 이런 구조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체의 문제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거악은 못 본 체하고 소악만 건드린 셈이다. 더구나 시장 내 이해관계자인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양보를 요구했다. 정규직 아버지들의 희생이 아들딸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지, 기업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외눈박이 인식으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한쪽에 치우친 논리로 정답을 찾을 수도 없다. 정답이라 우겨도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로부터 내려온 정책, 사회적으로 충분한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은 의견, 일방적인 소통은 자칫 혼란만 가중시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노·사·정 합의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승주 산업부 차장 sjhan@kmib.co.kr
[뉴스룸에서-한승주] 노동시장 제대로 개혁하려면
입력 2014-12-08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