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4)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다

입력 2014-12-09 02:42
1899년 아펜젤러가 촬영한 서울의 서쪽 성벽에서 찍은 파노라마 사진. 중앙의 성곽보다 높이 솟은 서양식 건물은 프랑스 영사관으로 현재 정동의 창덕여중 자리다. 프랑스 영사관을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한 문이 서대문(돈의문)으로 이 사진은 서울의 옛 성곽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희귀 자료로 꼽힌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아펜젤러가 찍은 1899년 서울 정동의 모습. 미국 북감리교 건물과 선교사 사택이 있었던 곳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기도로 시작된 서울 입성과 정착

아펜젤러는 1885년 7월 29일 제물포를 떠나 당일 밤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아펜젤러는 미국 테네시에 있는 버넷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서울 도착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는 어두운 밤 북서문(돈의문)을 통해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주님 발 앞에 무릎 꿇고 순종했던 것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서울에 입성한 아펜젤러는 첫해를 선교 토대 마련에 힘을 쓴다. 그는 교단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노력을 했다. 교육과 의료선교를 위해 좋은 부지를 물색하던 가운데 서울 정동에 기반을 잡게 된다. 이후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와 주한 미국인들을 위한 공동체 구역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인 커뮤니티를 만든다.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아펜젤러는 그녀의 친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현재 6개의 선교사 가정이 있다. 우리 부부는 이들 가정과 하나의 가족처럼 선교를 하고 있다. 또한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다. 우리는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정동의 집에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아펜젤러는 일본과 중국의 항구에 있는 외국인 거류지처럼 치외법권 성격을 지닌 미국인 타운을 정동에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거류지와 달리 정동은 시내 중심에 있고 왕의 궁궐과 지근거리에 있어 정치외교적인 상황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선교활동에는 제한적이었고 정부의 금교령이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어서 직접 선교는 시도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가 일구어 놓았던 정동의 선교사 거류지는 후에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배재학당 학생들의 협성회 활동을 도와주는 장소가 됐다.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이 시작되다

의료 선교가 한국 선교를 정착시키는 것에 기여했다면 아펜젤러의 교육 선교는 한국 선교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아펜젤러보다 서울에 먼저 입성해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료사역을 도왔다. 그는 선교 사역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순수 선교기금으로 설립된 최초의 선교병원을 정동에 세웠다.

정동의 병원에 오는 이들은 주로 평민과 가난한 민중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받기에 턱없이 힘이 부쳤음에도 스크랜턴은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진료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길가에서 죽어가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했다.

이러한 스크랜턴의 사역을 도와주기 위해 제중원에서 함께 따라왔던 2명의 한국인 동역자가 있었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이겸나와 고영필이었다. 1885년 8월 3일, 이들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 아펜젤러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왔다. 이러한 배움의 뜻은 근대교육의 요람이었던 배재학당 설립의 씨앗이 됐다.

아펜젤러의 가르침은 이내 소문이 퍼져 육영공원의 전신이었던 통역 양성학교, ‘동문학(同文學)’에서 영어를 배우던 학생 3명이 이곳에 합류했다. 이들의 목적은 대부분 ‘출세를 하기 위해서’ ‘관직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호기심과 출세욕으로 찾아온 학생들은 대부분 정착하지 못했다.

학기 도중 학생들이 떠나기 일쑤였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개학 일에는 심지어 단 한 명의 학생만으로 개강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빈자리는 수개월 내로 채워져서 18명 정도가 실제 출석인원이 되었다. 아펜젤러의 한국 정착은 늦었지만 배재학당은 근대교육의 도장이 됐다.

1885년 9월, 일본 주재 선교사 매크레이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아펜젤러는 근대교육의 완전한 커리큘럼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후 학생들의 인원이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했지만 그의 비상한 교육 이념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속속 입학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아펜젤러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어 습득을 무엇보다도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는 한국어 습득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선교 첫해에는 정착하기 위해 해야 될 일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한국어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미루지 않았다. 연이은 언어 소통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이내 한국어에 매진하였다.

이후에 아펜젤러는 한국에 왔던 신임 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을 전담할 정도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한국어에 정통하여 한·영 문법, 사전 등을 수정·보완하게 된다. 특히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을 아펜젤러가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 교육 관련 서적의 번역, 유창한 설교는 선교를 향한 열정과 그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