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심리적으로 나약해진 것이 원인이 아니다. 때문에 자신의 의지만으로 좋아지기 힘들고, 시간이 지난다고 낫는 것도 아니다. 특히 중장년 남성한테는 단순히 감정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흥분 증세를 보일 수도 있다. 또 주변 사람에게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해 더욱 주의해야 한다. 적극적인 우울증 조기 발견 및 치료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자칫 자살로 이어지기 쉬운 ‘중년의 위기’ 남성우울증이 왜 줄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예방할 수 있는지를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우울증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고려대안암병원 이민수, 강남세브란병원 김재진·석정호, 세브란스병원 김세주, 서울아산병원 김병수, 삼성서울병원 전홍진, (평촌)성심병원 전덕인 교수 등이 그들이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남성 우울증 원인·예방법
우울증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대표적인 정신병리다. 주요 우울장애(우울증)의 평생 위험률이 여자는 10∼25%, 남자는 5∼12%로 추산될 정도다. 자살에 이르는 비율도 다른 정신질환에 비해 훨씬 높다.
서울아산병원 건강의학과 김병수 교수는 “상담 중 인생이 허무하다는 안타까움 섞인 말을 중년 남성들로부터 종종 듣는다”며 “젊음을 불사르며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중년이 되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것이 없다며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치면 인생이라는 ‘판’에서 쫓겨날 것 같아 불안해지는 것이 중년 남성이다.
일상의 스트레스가 쌓여 ‘마음의 지진’ 일으켜
우울증은 충격적인 사건 등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을 때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일상의 소소한 스트레스가 심신을 지치게 만들고, 그것이 한계점을 넘어갈 때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가령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면 너무 힘들어 소파에 누워 TV만 보다 졸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자려고 하면 회사 일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한 채 다음 날 회사에 나가고, 다시 퇴근해서 TV보다 잠들고….
비(非)활동성의 덫에 빠져 우울증에 빠지는 과정이 이렇다. 휴일인데도 왜 집에서 잠만 자냐는 아내의 잔소리가 부부싸움으로 발전하고, 혹시 야외에서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더라도 자녀들의 못마땅한 모습만 눈에 들어온다. 가족 간 갈등이 커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마음은 점점 더 가라앉는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를 술이나 도박 등으로 풀려는 행위다.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냥 그때 기분에 그칠 뿐이다. 술이 깬 다음 더 우울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몸 상태도 나빠져 스트레스를 이겨낼 힘도 달린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는 “술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을 불러들이는 꼴과 같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사업을 하거나 돈이 많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사회적 지위나 돈에 상관없이 스트레스는 우리 곁을 항상 따라다니는 검은 그림자와 같다. 다만 우리의 행동과 대처 방식에 따라 그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바뀌기도 하고,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미풍으로 끝나기도 한다.
겉보기에 ‘환자 같지 않은’ 경우 많아 주의 필요
우울증은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난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때로는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실제로 자살 시도로 발전한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만 내거나 만사가 귀찮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쓸데없는 고민거리나 죄책감이 들고 괜히 짜증이 난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개운치 않으며 피로가 쉽게 쌓인다. 불면증과 식욕부진이 대다수 환자에게 나타나며, 정신집중이 되지 않고 건망증도 심해진다. 소화불량, 초조, 가슴 답답함, 두통 등의 다양한 신체증상도 자주 나타나지만 검진을 해도 아무런 신체적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는 우울증 환자도 많다. 특히 중년 남성 중에는 우울해도 우울하다고 말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우울한 감정을 속으로 꾹 눌러놓는 경우가 적잖다. 그런가 하면 마음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40, 50세가 돼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는데 내 마음 하나 못 다스리겠느냐”며 마음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우울한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다 보면 다른 증상으로 전환돼 나타난다. ‘우울하다’ 대신 ‘피곤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예민해진다, 불안하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이들이 있다. 알고 보면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낳은 결과다.
고려대안암병원 이민수 교수는 만약 중년의 남편이 일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면, 멍하니 TV만 보는 경우가 잦다면, 늘 조급해하고 기다리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걱정을 자꾸 하게 된다면,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면 한번쯤 우울증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성적인 환상에 집착하거나 빠져들 때, 고집스러워지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자꾸 화나 짜증을 낼 때, 의심이 많아지고 사소한 일에 집착할 때도 마찬가지다.
두려워 말고 당당하게 맞서는 게 극복의 첫걸음
우울증을 떨치려면 도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가장 좋다. 우울한 감정을 숨기려 하거나 부정해선 안 된다. 또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우울한 감정을 술로 해결하려 들거나 혼자만의 동굴 속으로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이 교수는 “우울한 감정이 찾아왔을 때는 그것을 똑바로 보고 ‘왜 내게 우울한 기분이 찾아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울해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된 이유와 상황을 이해하면 우울한 기분도 사라지게 된다”고 조언했다.
그런 기분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재진 교수는 “우울증이 찾아왔다면 왜 하필 지금 우울증이 생겼고,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 하는지, 나의 마음 습관 중에서 어떤 점이 우울증을 불러왔는지 의미를 찾아보라”고 주문했다.
우울증은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70% 이상 개선 효과를 볼 수 있다. 단 증상이 좋아진 뒤에도 적어도 6개월간은 꾸준히 더 복용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야 한다.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지,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면 도움이 된다. 규칙적인 생활, 충분한 수면, 적절한 운동, 긍정적인 사고도 중요하다.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세주 교수는 “우울증 환자들은 흔히 무슨 일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남을 용서하거나 자신 스스로 변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중년 남성, 우울증 주의보] 우리 아빠는 시한폭탄
입력 2014-12-06 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