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완(40·군산 양무리교회 청년부) 목사는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을 6개월간 벌인 잠수사였다.
그는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수몰 참사가 발생한 직후 목사가 아닌 ‘잠수기능사’ 신분으로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다. 그리고 정부가 사고 209일 만에 수색 작업 공식 종료를 선언한 11월 11일까지 쉼 없이 거센 물속에서 아이들을 찾아 헤맸다. 정확히 4월 25일 부터 11월 11일까지였다.
그가 목사 신분으로 구조 활동에 참여한 것에 대해 교계조차도 몰랐다. 양무리교회(홍기표 목사)와 그가 맡고 있는 교회 청년부 정도가 알고 있었다. 정 목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중보기도로 정 목사를 응원했다.
그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세월호 내부를 수색하며 시신 인양에 매달렸다. 매일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탁한 물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버지 아버지’ 하며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눈 뜨면 수색과 기도가 이어지는 바지선에서의 6개월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탐욕한 사회의 목격자’로 그 일에 참여케 해주신 것 같다”며 “하지만 찾지 못한 실종자 9명을 버리고 도망 나온 것 같아 여전히 미안하고 아프다”는 통한의 마음을 밝혔다. 특히 “배가 펄 속에 갇혀 찌그러진 부분인 ‘SP1’(다인실 객실을 지칭) 구역의 수색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데도 서둘러 수색 종료를 유도한 정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허탈해했다. 또 수색 진행 과정에서의 정부 대응을 두고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일침했다.
그러면서 “세상 어디나 크리스천이 4명 중 1명일 텐데 세월호 사건과 같은 탐욕을 보고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바로 우리 때문에 그 꽃다운 아이들이 죽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를 지난 1일 진도 팽목항에서 만났다. 강풍과 눈보라가 팽목항을 무인지경으로 만든 날이었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유가족 부스가 바다와 접한 한 구석을 지켰다. 기도용 초에 촛불을 켜고자 했으나 눈보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날 정 목사는 누군가 방파제에 세워 놓은 십자가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했다. 기도하는 이나 이를 지켜보는 이나 여전히 아팠다. 잊을 일도 아니고, 그만하자고 할 일도 아니다. 9명이 그 바다에서 아직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이 현장이 마음 아플 텐데 철수 20여일 만에 다시 오셨어요.
“찾지 못한 아홉 명이 있는데 그들을 놔두고 수색을 접은 것이 너무 속상해서죠. 버리고 도망 나온 것 같아요. 나머지 시신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아홉 명을 위해 다시 들어갈 기회가 생기면 가실 겁니까.
“당연하죠. 사실 수개월 동안 침몰 선박 곳곳을 수차례 ‘클리어’(특정 지역을 수색했다는 의미)했거든요. 그렇지만 SP1 구역은 한 번도 수색 못하고 철수했어요. SP1은 배가 바닥에 닿으면서 찌그러진 부분이고 펄이 쌓여 수색이 쉽지 않죠. 그렇다고 수색이 불가능하진 않아요. 포기하면 안 되는 부분인데 철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었죠.”
그의 “불가능한 부분은 아니다”라는 말은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신앙적 고백이었다. 동료 잠수사 대개가 “시간을 갖고 접근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느냐”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잠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다들 지쳤죠. 특별히 민간 잠수사들의 잠수병을 염려하더군요. 해경 등 기관 쪽에서 필요 이상 염려했죠. 그 과잉 염려가 언론플레이로 나타나기도 했고요. 하지만 잠수사들은 ‘하던 건데 왜 마저 안 하냐’였죠. 지휘부 쪽에선 이미 정부·해경의 의지 등을 알아채고 접는 수순을 밟은 거고요. 마지막 남은 SP1은 그래서 못한 겁니다. 요즘도 기도 중에도 혹 SP1에 있을지 모를 영혼들을 챙기게 돼요.”
-어느 때가 가장 미안합니까. 할 만큼 최선을 다하셨는데도….
“일곱 살 난 아들 하나가 있어요. 날씨가 궂어 피양하면 군산 집에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들이 물어요. ‘아빠, 몇 명 남았어?’ 하고요. 요즘 내가 집에 계속 있으니까 아들이 며칠 전에 또 묻더라고요. ‘몇 명 남았어?’라고요. ‘아홉 명 남았지’ 했지요. 그랬더니 ‘근데 왜 안가?’ 해요. 할말이 없더라고요.”
-목사 신분인데 어떻게 해서 참여하게 된 겁니까. 참여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목회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제가 2010년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시행하는 ‘잠수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요. 고향이 군산 어청도라는 외딴 섬입니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머구리(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였어요. 무엇보다 제가 해외선교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수기능사 자격을 따두면 선교에 유용할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세월호 사고 직후 한국해양구조협회 군산지부 선배 한 분이 현장에 가자고 했어요. 일단 가고 봤죠.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어요. 교회 목사님이나 청년들은 나중에 이해시켰죠.”
-실제 구조에 투입됐던 4월 29일 무렵이면 실종자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때였죠. 세상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고요.
“네. 제가 간 날 ‘언딘’이라는 회사의 바지선이 새로 들어왔어요. 100여명의 잠수사들은 계속되는 수색에 이미 지쳐 있었죠. 해경 경비정 바닥에 박스 깔고 쪽잠 자며 수색했으니까요. 하지만 언딘 바지선은 숙박시설을 갖춘 전문업체 것이어서 한결 나아졌죠. 하루 잠수 4번 정도 했어요. 물살이 빠르고 탁해 50㎝ 앞도 안 보여요. 물속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면 탁해져 아예 안 보이게 돼요. 날마다 시신 대하는 날이 계속됐죠. 정조시간에 맞춰 일하다 보니 다해봐야 서너 시간 잘까요. 군대 다녀온 분들 이해하시겠지만 24시간 5분 대기조라고 보면 됩니다. 체력이 있는 한 수색해야 했으니까요.”
-직접 시신 수습도 하셨을 텐데. 목회자이셨으니 만감이 교차했겠군요.
"29일 여학생 시신을 첫 수습했어요. 여자인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알아요. 시신이 닿으면 마치 물에 불은 매트리스 같은 촉감입니다. 제가 'NO1'(경력이 많은 잠수사로 일선서 수색)이니 시신을 NO2에게 넘기고 그가 25m 수면 가까이까지 가져가죠. 수면에 거의 다다라서는 다이버에 인계합니다. 다이버가 망자에 예의를 갖춰 잘 안고 배에 오르죠. 그때마다 '하나님 이들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되뇌어요. 무슨 죄가 있겠어요. 내가 제주와 경기도 용인에서 목회했을 때 가르치던 중·고등부 아이들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선실 4층 바닥에서 교사 한 분을 수습했어요."
-바지선 주위 현장은 하늘 아래 어찌 그런 참혹한 광경이 있겠나 싶을 정도였겠습니다. 참담함에 말을 잃었을 것 같은데요.
"학생들 시신을 수습하다 보면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어요.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것,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이죠. 손에 상처가 없어요.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을 믿고 대기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거죠. 질식 순간에 숨을 참으려고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싶어요. 5월 중순을 넘어가면서는 시신 부패가 생겼어요(그 내용은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다). 잠수사끼리 모이면 욕을 했어요. 선장 죽일 놈이라고요. 하선 명령만 내렸어도 구명복 입고 있던 승객이 모두 살 수도 있었는데…."
-악몽 꾸시진 않았습니까.
"현실 자체가 악몽이었죠. 흔히 여객선을 보면 동그란 창문이 있잖습니까. 그 창문은 두께가 엄청나요. 쉽게 깨지지도 않고요. 한데 한 여학생이 그 두껍고 좁은 창문을 깨고 탈출하려다 결국 못하고 머리가 낀 채 발견됐어요. 모두 그 참혹한 광경에 울었죠. 그 여린 여학생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져요. 그날 밤, 시편 23편을 읽고 또 읽었어요. '너희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라고 했어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셨어요. 아이들을 포함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어요."
-주변 분들이 사고와 관련된 경우도 있었지요. 가족은 수색 작업을 반대하지 않았나요.
"제 선배 목사 사모의 조카가 실종자였어요. 넷째 딸 중 막내였는데 제주도 살다 4년 전에 안산으로 이사를 갔다가 그리된 거죠. 고향으로 가는 수학여행인 거죠. 그 부모는 장례식 때 아이가 있는 어른들은 참석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또 잘 아는 수색 참여 잠수사 조카가 실종자였어요. 그 잠수사는 선실 4∼5층에 있을 조카를 찾아 헤맸어요. 그러다 유가족 일원으로 나가게 됐고요. 그가 수색하던 곳을 제가 맡았는데 이틀 후엔가 시신을 찾았어요. 아내는 수색 일을 반대하지 않았어요. 결혼 전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잠수사들 노고가 이만저만 아니었겠습니다.
"304명 중 295번째 희생자 황지현양을 4층 중앙 여자화장실에서 수습했어요. 한데 그 방은 7월 이후만 해도 세 번을 들어가 샅샅이 수색한 곳이죠. 해군, 해경, 민간 등이 총 10번을 들어갔을 거예요. 그런데도 더듬거리는 손에서 벗어난 거죠. 그만큼 구조가 어려웠죠. 그 바람에 잠수사 등 구조관계자의 희생도 불렀고요."
-잠수사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해군, 해경, 민간 등이 뒤섞여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민간 잠수사 60여명, SSU(해난구조대)·UDT(해군 수중파괴대) 등 해군·해경 측 60여명이 활동했어요. 보조인력 등을 합하면 총 200여명이 바지선에서 생활했지요. 해군·해경은 3교대, 민간은 24시간 체제로 돌아갔어요. 수중구조업체가 '언딘'에서 '88수중개발'로 바뀐 후 잠수시간을 늘리기 위해 '나이트룩스' 방식이 도입됐죠. 산소비율을 높여주는 나이트룩스 방식은 기존 30분 작업 시간을 배로 늘릴 수 있죠. 한데 민간은 그 방식에 따라 작업 시간을 늘려 구조하는데 해군·해경은 검증되지 않았다며 거부했어요. 특히 수색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경의 태도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소방관이 위험하다고 불속에 안 뛰어 들진 않아요. 사고가 났을 때 왜 아무도 뛰어들지 않았을까, 검증되지 않아서? 훈련이 없었던 거죠.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공무원들이구나 싶었어요."
-해경과 해양수산부의 우왕좌왕을 수색 과정에서도 경험하셨다면서요.
"제가 20여명의 잠수사를 대신해 해경을 상대로 한 서류 작업을 해준 적 있습니다. 한데 그 서류를 접수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담당자만 네 번 바뀌더라고요. 그때마다 제게 서류 제출을 요구해요. 보냈다고 얘기하면 담당자가 바뀌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보내면 또 일주일 만에 물어온 경우도 있었어요. 순환근무해 그렇다고 하더군요. 국장급만 세 번 바뀌더군요. 그렇더라도 업데이트만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해양수산부도 마찬가지였어요. 잠수사들 치료 등과 관련해 문의하면 해경은 해양수산부에, 해수부는 범정부대책본부에 돌려요. 서로 책임 안 지려고 빙빙 돌리는 거죠."
-어디 아프시진 않습니까. 잠수병 등 후유증도 대비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해단식 때 해경 고위관계자 분이 민간 잠수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다 조치해놨다고요. 어찌어찌해 제가 제일 먼저 경남 삼천포 고압산소전문센터가 있는 병원으로 가게 됐어요. 갔더니 아무런 연락 못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수중구조 업체에 문의하라고 해요. 해경, 해수부에 연락하면 서로 돌리고요. 해경이 한다는 얘기가 '필요하면 당신 돈 내고 진료 받고 기다려 봐라'였어요. 2주가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고요. 필요할 때 쓰고 끝인가 싶었죠. 큰 병나는 잠수부들은 앞으로 어떡해야 되나요. 해경이 많이 부족해요."
-순환구호법에 따라 종사명령을 받으셨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일단 현장에 뛰어들으셨습니다. 신분은 목회자였고요. 성령에 의지했을 것 같습니다.
"목사란 신분을 밝히지 않았죠. 팀워크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지선에 올라오거나 쉬는 경우 기도하고 성경 들여다보니 주위 사람들이 '집사요, 장로요' 하고 물어요. 동료들이 (실종)애들 빨리 수습할 수 있도록 기도 '쎄게' 해 달라고 했어요. 저는 그런 잠수사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어요. 몇 번 그만 둘까도 생각했죠. 청년부 하계 수련회도 가야 했고요. 교회 청년들 응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저는 목회자로서 그들에게 참 미안했죠. 그러나 잠수병 앓으며 고생하는 동료들, 9명의 실종자들을 남겨 놓고 떠날 순 없었어요. 주일예배를 침몰선 안에서 드려야 했죠. 성령의 인도 없인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왼손 모르게 하시던 일이었는데 저희가 번거롭게 합니다.
"전 목회지 목사님과 통화하다가 알려졌어요. 교단 총회 사회봉사부로 제 얘기가 들어가게 됐죠.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세월호 참사와 구조 과정에서 한국 교회가 늘 함께 했음을 알리고 싶어서예요. 잠수사와 팽목항의 유가족, 봉사자 등을 위해 끝까지 남아 도운 것이 진도군기독교연합회,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이었어요. 사고 초기 열량 소모가 많은 잠수사에게 1식3찬 제공이 전부여서 불만이 높았죠. 다행히 한국 교회가 수색 바지선에까지 간식을 제공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생필품도요. 그리고 모두가 떠났어도 연합회와 봉사단은 끝까지 남았어요. 한데 세상에 알려지기는 팽목항에서 이벤트성 행사만 하는 분들이에요. 교인들만이라도 한국 교회의 노력을 알고 계시라고 적극 인터뷰에 응하게 됐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잖아요. 한국 교회는 늘 한 생명을 살리려고 애썼고요."
팽목(진도)=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미션 르포] 나는 목사, 세월호 잠수사… “하나님 아버지…”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입력 2014-12-06 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