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언론은 권력·목회 등 성역에 대해서도 진실 밝히는 용기를”

입력 2014-12-06 04:28
국제기독언론인클럽 데이비드 에이크먼 박사가 지난달 28일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저널리스트는 진실 보도를 넘어 하나님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에이크먼 박사는 국민일보 창간 26주년을 맞은 독자들에게 자필 메시지(아래)를 남겼다.곽경근 선임기자
데이비드 에이크먼 박사 저서들(위) .에이크먼 박사가 1989년 미국 버몬트 주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오른쪽)의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에이크먼은 솔제니친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명석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데이비드 에이크먼 제공
“기독 언론인은 사생활의 투명성과 업무에서의 신실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실 보도를 넘어 우리가 가진 희망의 이유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달 27일 서울 영등포구 KBS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세계기독언론인포럼 현장. 70세의 노(老)기자는 또박또박 힘 있게 설명했다. 몸이 불편해 전동휠체어에 앉아 강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단호했다. 그는 “기자들은 나쁘고 타락한 소식을 보도해야만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면서 “언론인의 사명은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에이크먼(David Aikman) 박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에서 23년을 일했고 이후 뉴욕타임스 기자, ABC NBC CNN 폭스뉴스 프리랜서, 전문 해설위원 등을 거치며 40년을 언론계에 종사한 베테랑 저널리스트다. 1989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보리스 옐친을 인터뷰했고 앞서 빌리 그레이엄과 테레사 수녀 등도 만났다. 한국에는 73년 처음 방문해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등을 만났다. ‘베이징에 오신 예수님’(좋은씨앗), ‘위대한 영혼들’ ‘믿음의 사람’ 등 10여권의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국 태생인 그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뒤 워싱턴대에서 러시아와 중국 역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98년 세계 기독 언론인들의 네트워크인 ‘게그라파(Gegrapha·국제기독언론인클럽)’를 창립해 전 세계 기독 언론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고 있다. 게그라파는 그리스어로 ‘나는 쓸 것을 썼다’는 의미다.

에이크먼 박사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미국 최초의 홈스쿨 대학인 패트릭헨리대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은 40년 기자 생활을 정리 중이며 그가 만났던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정리한 경험담을 집필 중이다. 그는 권당 125쪽짜리 기자수첩 450권을 자신의 집에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몽골어 터키어 히브리어 등 6개 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언어적 감각이 탁월하다. 포럼 다음날인 지난달 2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국민일보빌딩에서 그를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데 건강은 어떤지 궁금하다.

“나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 이 병은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치료법도 개발되지 않았다. 나의 경우엔 20년 전 발병했다. 갑자기 손이 얼얼해지면서 팔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약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4개월이 지속돼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는 증상이 호전됐고 11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다리가 약해지는 것을 감지했고 두 다리의 균형이 안 맞으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휠체어는 2008년부터 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오셨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나.

“한국에 오게 되어 영광이다. 한국에 오기 전 기도했다. ‘주님 제가 한국에 가기를 원하시나요?’ 했을 때 주님은 가라는 마음을 주셨다. 내게는 이번 한국서 열리는 포럼에 참가할 힘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힘을 주실 거라 믿었다. 한국은 나에게 특별한 나라다. 세계오순절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73년 처음 방한했다. 그때 조용기 목사를 만났고 이후에도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 한국교회의 강력한 기도가 흥미로웠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라는 점도 놀라웠다. 지난 99년에는 선교운동의 하나였던 ‘AD 2000’과 관련해 많은 선교사들을 만났다.”

에이크먼 박사는 영국 성공회 배경의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고 기숙사가 있는 기독교 사립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15세 이후 무신론자가 됐다. 학교에서 채플에 참석하며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옥스퍼드대에 입학했고 졸업할 무렵이었다. 거리에서 한 목회자를 만났다. 목사는 그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성경구절 하나를 읽어도 될까요?” 교회에 가자거나 전도지를 갖고 접근하지 않았다.

목사가 읽은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마태복음 11장 28∼30절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성경 말씀이 그를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마치 예수께서 그 목회자를 통해 에이크먼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은 주일.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에이크먼은 그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로 향했다. 성찬식에 참여했다. 목사는 그를 발견하고 “무신론자라고 하지 않았나요?”라고 말했다. 스물한 살. 그는 비로소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좋아하는 성경이 사도행전이라고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사도행전은 스펙터클한 모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됐고 사도바울의 위험스러운 선교여행이 펼쳐진다. 말이 선교여행이지 사실상 고난의 행군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위험이 많을수록 영광은 더 위대하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는 위대한 기쁨이 있다. 사도행전은 또 의사인 누가에 의해 씌어졌다. 누가는 사실을 다루는 기자와 같다. 누가복음 1장 3절에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현대적으로 말하면 취재기자가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크리스천 저널리스트로서 어떤 영적 변화를 경험했나.

“73년 한국에 오기 직전 홍콩에 갔을 때 성령 세례를 경험했다. 이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뀌어 놓는 경험이었다. 나는 매일 방언 기도를 했는데 1시간 30분을 그렇게 기도했다. 물론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부터는 내가 어떤 모임에 가게 되면 예수를 전하게 됐다. 만약 어떤 사람의 아들이 마약에 중독됐다고 말하면 그에게 가서 말했다. ‘혹시 아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해보셨나요?’ 그러면 그들은 놀란 눈으로 ‘예수님에 대해 더 말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나를 한 번도 예수쟁이라고 비꼬거나 놀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상황 속에서 역사하셨다.”

-40년 기자생활을 했다. 혹시 역사에 영향을 미친 기사가 있는가.

“나의 어떤 기사가 역사를 바꿀 정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캄보디아에 대한 것이다. 75년 캄보디아가 공산화됐는데 그 내부에서는 ‘킬링필드’라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은 캄보디아에 존재했던 이런 현실을 몰랐다. 나는 당시 현장에 있었다. 나는 ‘타임’에 캄보디아 사태를 보도하면서 ‘악(evil)’이라고 썼다. 많은 독자들은 왜 타임지가 도덕적 판단을 했느냐고 비판했다. 회사 안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호하거나 이중적 단어로 얼버무리는 것보다는 ‘완전한 악’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항상 잘못이라는 미디어의 보도에 세뇌돼 있었다. 그래서 미국을 ‘악의 원천’으로 여겼다. 나는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 미국이 악의 원천이 아니라 악한 신조를 가진 공산주의가 문제라는 것을 지적했다.”

-만약 지금 다시 타임지 기자로 돌아간다면 동성애 이슈 대해서는 어떻게 보도했을지 궁금하다.

“동성애 이슈는 1960년대 미국의 성 혁명에서 비롯됐다. 당시 젊은이들은 자유연애와 마약, 히피, 로큰롤,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을 이끌며 완전한 자유를 원했다. 동성애운동자들도 이런 자유 속에서 강력한 정치적 활동력을 얻었다. 그 결과 지금은 미국사회의 동일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미국인을 향해 동성애는 선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동성애자가 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게 됐고, 동성애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면 ‘악한 자’로 찍힐 정도가 됐다. 동성애운동은 동성결혼을 합법화시키는 등 전통적 가족관까지 해체시키고 있다.

나의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동성애에 대해 말한다면 동성애는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로서 나는 직접 동성애가 악하다고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내 기사를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의 폐해에 대해 경험을 가진 목회자를 만나 그를 통해 동성애의 나쁜 결과에 대해서는 보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을 해체하고 질병을 일으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악의 현상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언론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언론인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존재한다. 크리스천 기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독 언론인은 사건 이면에 있는 원인 분석과 함께 진실 너머의 희망을 전하는 인사이트를 갖춰야 한다. 또 외부의 압력과 핍박 속에서도 권력자나 목회자 등 성역으로 간주되는 영역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론인들은 무엇보다 뇌물이나 권력 앞에서 무릎 꿇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교만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선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 앞에 겸손해야 한다. 저널리즘은 소명이다. 소명에 따르고 있는지 날마다 자기를 살펴야 한다.”

-지금까지 만난 인물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 인상 깊다. 그는 매우 지적이었다.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보리스 옐친이다.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전형적인 관료 타입을 초월했다. 자유를 믿었고 언론의 비판에 대해서도 겸손했다. 뒤를 이었던 블라디미르 푸틴과 비교된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