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주동자, 배후조종자 그리고 대중

입력 2014-12-06 04:30

1999년 상영된 영화 ‘잔다르크’에서는 흔히 위인전에서 보는 잔다르크의 영웅담만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샤를 7세를 하나님이 프랑스에 보내주신 왕으로 확신하고 신의 전령사를 자처하며 전쟁터에서 선봉에 선다. 하지만 영화에서 샤를 7세는 그런 잔다르크를 이용한다. 샤를 7세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누구를 그런 주동자로 세워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그 시름을 모두 해소해주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나왔으니 말이다. 백성들은 어떤가. 잔다르크를 통해 희망을 경험하였으나 여전히 가난에 찌든 그들은 그저 순진한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것인가.

비슷한 관계 설정은 아주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선봉에 서는 자는 자발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여러 명 중에서 서서히 부각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최근 TV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있다. 대중은 그들을 환호하며 세력을 형성하고 새로운 일체감과 희망을 경험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대중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배후조종자라는 아주 묘한 존재가 숨어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있기도 하지만 주동자가 가시화되면서 그제야 생겨나기도 한다. 장기는 여러 말을 가지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여기서 왕이 주동자이고 졸이 대중이라고 한다면 배후조종자는 장기의 말이 아니라 그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은 왕을 지키고 졸을 희생시키며 게임을 이기려 할 것이고, 그러다가 게임에서 지면 새 판을 시작할 것이다. 그에겐 왕조차도 계속 지켜야 할 존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 작은 조직, 교회, 사회와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예수님의 등장이다. 예수님은 주동자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기득권자인 장로들은 예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저울질하며 정치적인 고려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걸림돌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 그들은 그들의 능력을 어김없이 발휘했다. 예수를 죽일 권한을 발휘하도록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하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능가하는 대중을 동원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했다. 대중은 심지어 자발적으로 외쳤을 것이고, 그중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배후조종자는 예수가 죽어 없어지는 경우와 계속 남아 사람을 선동하는 경우를 고려하며 어느 쪽으로 가든 자기들에게 불리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짜놓았을 것이다. 양쪽 다 시나리오를 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때가 있다. 요즘 기독교 내부에서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가 예언처럼 나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한다.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말대로 된다면 예언대로 됐다고 할 것이고 말처럼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인자하셔서 벌을 유보하셨다고 하거나, 우리가 회개를 해서 하나님이 벌을 거두셨다고 할 것이다. 책임 없이 뱉어낸 말들은 이렇게 도망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확률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같이 어수선한 우리 상황에서 대중은 이러한 말에 동요한다. 기독교인들이 좀 더 지혜로운 자세를 보이면 좋겠다. 과연 이러한 흉흉한 표현을 쓰는 주동자와 그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에서 어떤 이들이 저울질을 하고 이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 있는지 잘 보면 좋겠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의식’이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막말을 해도 도망갈 구멍을 마련하기보다 결과에서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깊이 뉘우칠 것이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말은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 심겠다고 했는데, 비슷하게 우리 기독교인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것”(로마서 14:8)이다. 정말 전쟁이 걱정스러우면 이상한 소리에 현혹될 게 아니라 일기예보와 흡사하게 군사 동향 정보를 점검하기 바란다.

<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