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강남역 거리를 걷다 보면 어김없이 만나는 말쑥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가판대를 설치하고 소책자를 나눠준다. 한글판 영어판 중국어판 그리고 일본어판을 나눠주는데 그동안은 무심코 지나쳤다.
며칠 전 아침 가판대 앞을 지나치다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저 젊은이들이 전하는 성서의 진리는 어떤 것일까. 제대로 된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 때문에 “어떤 교단에 속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한글판과 영어판 소책자를 집었다.
그들은 나의 어린시절 남도의 작은 도시의 골목까지 손가방을 들고 소책자를 전하던 아주머니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19개의 질문과 부록으로 구성된 책자는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으며, 성경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하고 남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책 읽기에 단련이 돼 있는 나는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어디에 들어 있는지를 금방 간파할 수 있었다. 4번째 질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소책자의 핵심이라고 추측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책의 핵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책자에는 “예수는 어디에서 온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진 다음에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소책자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하느님의 맏아들은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하느님과 동등합니까?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아들은 창조된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분명히 시작이 있었던 데 반해, 여호와 하느님은 시작이나 끝이 없습니다.”(41쪽) 그들이 가르치는 성서의 진리는 내가 아는 진리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분입니다”(41쪽)라는 점과 “예수는 높은 지위에 있다는 의미에서 ‘신’이지만 전능한 하느님과는 동일하지 않다”(203쪽)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질, 계급, 양, 성품 등의 면에서 동등하며 기능면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한복음 10:30) 등과 같은 성서의 진리를 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할 뿐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이런 부류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기원 후 4세기의 아리우스파들의 후예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색적인 진리를 평신도나 보통 사람들이 변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높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 다음에 나는 기독교에서 대부분의 갈등과 위기의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즉, 기독론에 대한 잘못된 시각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거듭 깨우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이고 종속된 자라는 주장은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 수밖에 없다고 본다.
창조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신성이 빠져 버린 진리를 어떻게 성서적 진리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이색적인 주장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종교나 종파의 신도가 되는 것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 종교들은 스스로의 노력을 강조한다. 스스로 노력을 통해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령이 내 몸에 내주하게 되는 그런 믿음 체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상당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과 같이 성부 하나님의 창조된 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우리에게 구원주가 될 수 있는가. 한걸음 나아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갖는 세 가지 직분인 참왕, 참제사장, 참선지자 직분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올바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믿음이 지나치게 지식 중심으로 흐르는 것도 위험하지만 ‘지식 없는 열심’도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는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의 대한 잘못된 이해는 그들의 입장에서 의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히는 활동 무대를 제공하게 된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진리의 허리 띠’(에베소서 6:14)를 더욱 단단하게 맺는 일이다. “모르면 당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공병호의 세상 읽기] 강남역 이단의 풍경
입력 2014-12-06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