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재일동포 지식인이 묻는 ‘우리는 그리고 미술은’

입력 2014-12-05 02:10
벨기에 입양인 작가 미희와 전시회를 보는 저자 서경식(오른쪽). 반비 제공
한 아파트의 1층부터 꼭대기층까지 방문해 거기 사는 가족들을 똑같은 구도로 촬영한 정연두의 ‘상록타워’(2001년).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를 위한 진혼가로 그린 신경호의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 1980'(1980년).
1992년 국내에 번역, 출판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는 미술기행서 분야의 시초와 같은 책이었지만 지금도 이 분야를 대표하는 책으로 남아있다. 22년이 지난 이 책이 짝을 찾았다. 최근 출간된 ‘나의 조선미술 순례’가 그것이다. 당시 40대였던 저자는 60대가 되었다.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인 서경식은 강상중(세이가쿠인대학 학장)과 함께 국내에서 책을 가장 많이 내는 재일동포 지식인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시작으로 ‘소년의 눈물’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난민과 국민 사이’ ‘디아스포라의 눈’ 등 10여권이 번역됐다.

새 책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도 미술을 역사와 현실, 삶의 맥락 속에 던져놓고 서로 뒤섞어가는 방식을 통해 기존 시각을 낯설게 만들고 감춰진 측면을 내보이며 의미를 확장하거나 재규정하는 서경식 특유의 글쓰기는 여전하다. 비극과 죽음, 민족, 차별, 배제, 섹슈얼리티, 가족 같은 작가 고유의 주제들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고독하고 비장했던 30대 청년 시절의 서양미술 순례에 비해 한결 편안해진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미술 순례에는 부인 F나 친구들이 자주 동행한다.

이 책이 다루는 미술가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이쾌대, 신윤복, 미희 등 6명에 불과하다. 부록에 나오는 홍성담, 송현숙을 포함해도 8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 ‘조선미술 순례’가 가능할까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들이 한국미술의 대표 선수들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미술의 주변 혹은 바깥에 있는 미술가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서경식 스타일’이다. 그는 전체를 조망하고 해설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미 구성된 전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그의 관심이다. 그것은 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깊고 폭넓게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조선미술’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어떤 질문에서 출발했는지 알려주는 힌트가 된다. 왜 ‘한국미술’이나 ‘우리미술’이 아니라 ‘조선미술’일까? 서경식은 ‘우리/미술’의 의미로 ‘조선미술’이라는 말을 선택했다고 한다. ‘우리’란 무엇인가? ‘미술’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 두 가지 질문에서 출발한 긴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서경식은 벨기에 입양인 출신의 미술가 미희(나탈리 르무안)를 다루면서 “미희를 ‘우리’로 인정하고 그 미술을 ‘우리 미술’로 포함한다는 생각은 ‘우리’의 쇠퇴가 아니라 ‘우리’라는 개념 자체의 변혁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과도 합치한다”고 말한다. 한국미술에서 잊혀진 월북화가 이쾌대(1913∼1965)를 불러낸 이유도 마찬가지다.

재일동포 2세로서 서경식은 배제와 차별, 소외에 대해 극도의 민감성을 소유한 작가다. 그는 이런 감수성을 바탕으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문제에 대해 언제나 주목해 왔고, 주류의 이야기에 대치되는 대항적인 이야기를 생산해 왔다. 평생 애호해온 미술에 대한 태도도 동일하다. 그는 미술을 미학이나 미의식, 전문성, 예술성의 영역에서 다루는 태도에 반대하며 미술을 역사와 현실, 삶의 영역으로 데려가 새로운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서경식이 민중미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신경호와 홍성담, 두 명의 민중미술 작가를 통해 그는 지금은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민중미술을 조명하면서 진정한 사실주의가 무엇인가 탐구한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린다’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내 삶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지향점을 보여주는 그림, 또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확신을 주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신경호의 말은 사실주의에 대한 좋은 답변이다.

젊은 현대미술가 정연두와 나눈 얘기는 우리가 흔히 쓰는 ‘한국적’이란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비현실적인지 알게 한다. 서경식은 “‘한국인’이란 한국인이라는 ‘본질’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문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며 “정연두의 작품이 한국적인 까닭은 한국이라는 본질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맥을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다”라고 평가한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는 간소하지만 저자가 한 명 한 명 작가들을 오래 들여다보며 축적한 얘기들이라서 이야기 하나하나가 단단하고 깊다. 서경식은 한국미술이 간과하거나 배제한 부분을 충실하게 채워 넣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