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당신의 남자친구이기를, 당신의 남편이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10월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씨는 숨지기 전 따로 유언장을 작성하지 못했다. 3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찍은 동영상이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영상에서 “만약 내게 재난이 닥쳐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하고 떠나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남기는 이야기, 편지, 그리고 제 유언장”이라며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
많은 이들에게 유언장 작성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길한 행위쯤으로 받아들여진다. 임종 직전에나 해야 할 일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삶의 흔적을 정리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정리의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는 4일 “임종 직전에 남긴 유언장은 재산분할 등의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많고,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유언자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힌 것이 맞는지 애매할 때가 많아서 법적 다툼의 여지가 크다”고 설명했다.
날짜, 주소, 이름, 날인은 ‘필수 항목’
유언장은 미리 작성해 두는 편이 좋다. 남겨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위로이자 배려다. 세상을 떠난 이후 재산을 둘러싸고 자식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상황도 막을 수 있다. 유언장 작성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국 가정법원에 접수된 유언 관련 사건은 지난해 262건으로 2004년 118건에서 2배 이상 늘었다.
유언장 작성은 복잡하지 않다. 몇 가지 유의점만 숙지하면 된다. 가장 기본적인 유언장은 직접 손으로 쓴 자필유언이다. 반드시 본인이 직접 손으로 써야 한다. 컴퓨터로 작성하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아 적은 유언장은 효력이 없다. 복사된 자필유언장도 효력이 없긴 마찬가지다.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은 작성 연월일(年月日)과 주소, 이름, 날인이다. ‘2014년 11월 여의도동에서 홍길동’이라고 쓴 유언장은 어떨까? 이런 유언장은 무효다. 대법원은 날짜와 주소를 정확하게 모두 기재하지 않으면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홍길동씨는 날짜를 빠뜨렸고, 주소도 제대로 쓰지 않았다. 특히 연월일은 유언장이 여러 장이 발견됐을 때 가장 최근에 작성된 유언장에 효력을 부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어서 절대 빼먹어선 안 된다. 이름은 자기 성명뿐 아니라 집에서 불리는 예명 등을 써도 상관없다. 유언자가 누군지 확인이 가능한 수준이면 된다. 날인은 인감도장, 지장 모두 가능하다.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이 없다. 통상 부동산이나 예금 주식 연금 등 재산분할 내용과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적는다. ‘뒷산에 묻어 달라’ ‘화장해 달라’ 식으로 장례방식을 적어두기도 하지만 법적 강제성은 없다.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은 주로 재산과 관련된 부분이다. 예컨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무상으로 물려주거나 은행에 돈 관리를 맡기는 신탁, 재단설립, 상속재산 분할 금지, 어린 자녀를 위한 후견인 지정 등은 법적 효력이 인정된다. 유언을 제대로 집행할 믿을 만한 사람을 유언집행자로 정해 기입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신해철 ‘영상 유언’ 법적 효력은 없어
최근에는 스마트폰 촬영 기능을 이용한 유언 영상 만들기도 유행하고 있다. 민법은 영상이나 육성으로 유언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녹음에 의한 유언’을 인정하고 있다. 우선 유언자가 내용과 자신의 이름, 연월일을 또박또박 말하면 된다. 다만 자필 유언과는 다르게 증인이 필요하다. 증인은 유언장 녹음 또는 촬영 시 유언 내용이 정확하다는 확인을 하면서 이름을 말하면 된다. 증인이 등장하지 않는 신해철씨 유언 영상은 엄밀하게 말하면 법적 효력이 없는 셈이다. 증인의 수는 따로 규정돼 있지 않지만 통상 2명 이상을 확보하는 것이 안전하다. 이때 증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미성년자, 후견을 받고 있는 사람, 유언에 의해 이익을 받을 자, 배우자와 직계혈족은 증인이 될 수 없다.
이것도 저것도 복잡해서 싫다면 공증인을 찾아가면 된다. 2명 이상 증인이 참여한 상태에서 유언자가 유언 내용을 구술하면 공증인이 대신 작성하는 식이다. 형식 등은 공증인이 알아서 작성해주니 수고를 덜 수 있다. 약간의 수수료는 지불해야 한다.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은 공증 자체로 법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자필유언이나 녹음유언처럼 사망 이후 법원의 검인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다.
기본양식 지키면 언제든 수정 가능
비밀증서에 의한 유언과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도 있다. 비밀증서의 경우 유언자가 자기 이름을 기입한 유언장을 봉투 등에 담아 밀봉한 뒤 밀봉한 부분에 도장을 찍는다. 2명 이상의 증인에게 밀봉서를 보여주고 확인을 받아야 한다. 내용을 보여줄 필요는 없고, 봉투 안에 유언장이 들어있다는 사실만 확인받으면 된다. 봉투 겉면에 제출 연월일을 쓰고, 유언자와 증인이 각각 서명 또는 기명날인해야 한다. 제출 연월일부터 5일 안에 공증인 또는 법원에 제출해 확정일자 도장을 받아야 한다.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방법은 질병 등 급박한 사유로 유언장을 작성할 수 없을 때 쓴다. 증인 2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언 내용을 말하고, 증인 중 1명이 이를 받아 적는 식이다. 대법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언이 있은 날로부터 7일 안에 가정법원에서 검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법원에서 검인을 받지 못한 유언은 무효다.
개그우먼 이성미씨는 노트에 매일 유언장을 써 나가고 있다고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말했다. 이씨는 “암 수술을 하러 들어가면서 영영 못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 이후 노트에 여러 가지를 적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편지도 써놓고, 남겨줄 유산까지 적어 놨다”고 했다.
기본 양식만 제대로 지킨다면 유언장은 언제든 수정·삭제·추가·철회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이 변호사는 “살아 있는 동안 재산 상황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유언장을 작성해 두고 1년 단위 등 주기적으로 수정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슬로 뉴스] 증인 없는 故신해철씨 ‘영상 유언’ 법적 효력 없다는데… 웰다잉의 마침표, 유언장 쓰기
입력 2014-12-05 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