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호 화염처럼 붉은 태양이 남해 수평선에서 불끈 솟는다. 고흥의 하늘과 바다를 캔버스 삼은 남열해수욕장의 아침노을이 이곳 출신 화가 천경자의 그림처럼 황홀한 색채를 연출한다. 하루 종일 봉래산 삼나무숲과 팔영산 편백나무숲을 산책하던 태양이 득량만 갯벌을 향한다. 온기 잃은 햇살이 뻘배에 의지해 꼬막을 채취하는 아낙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진다. 이윽고 시시각각 고도를 낮추던 태양이 스스로 만든 고흥 앞바다의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요즘의 고흥은 곳곳에 향수를 뿌려놓은 듯 유자향이 그윽하다. 초록색 도화지에 노란색 점이 촘촘하게 찍힌 거대한 점묘화 속에서 유자 수확이 한창인 전남 고흥은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불린다. 유자향에 취해 이리저리 달리다 보면 나로우주센터가 위치한 외나로도,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든 소록도, 해상교통의 중심지인 녹동항, 그리고 고산 윤선도가 반했다는 거금도 등이 버선발 어머니처럼 반갑게 맞는다.
지도에서 한 삽만 뜨면 외딴섬이 될 것 같은 전남 고흥에 첫발을 디디면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인 팔영산(608m)이 먼저 반긴다. 낙타등처럼 생긴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팔영산은 지난 2011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고흥의 진산. 정상에 서면 고흥반도를 비롯해 다도해에 흩뿌려진 230개의 보석 같은 섬과 일본의 대마도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팔영산 자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편백나무숲이 위치하고 있다. 한 제지회사가 종이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1980년대 초 조성한 편백나무숲은 150㏊, 아름드리 편백나무 15만 그루가 하늘을 가린 숲에는 3.5㎞ 길이의 탐방로도 조성되어 있다. 산새 소리를 벗삼아 평탄한 산책로를 걷다 보면 상큼한 피톤치드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고흥 여행의 진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KSLV-1)가 지난해 1월 30일 오후 4시 우주를 향해 힘차게 솟아오르던 그날의 감격을 맛보는 것이다. 남열해수욕장 옆 145m 높이의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로켓 모양의 고흥우주발사전망대에 오르면 직선거리로 16㎞ 떨어진 외나로도의 나로우주센터에서 금방이라도 굉음과 함께 로켓이 날아오를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고흥우주발사전망대에서 조우하는 다도해는 시리도록 푸르다. 용이 암벽을 타고 승천했다는 용바위 뒤로 사도 낭도 개도 백야도 등 여수의 섬들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다. 서쪽으로는 남열해수욕장을 비롯해 첨도 비사도 등 해창만의 섬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정담을 나눈다. 남열해수욕장은 남해안 최고의 일출 명소로 금오열도에서 해가 솟으면 다도해를 뒤덮은 구름이 나로호의 화염처럼 활활 타오른다.
바다를 막아 옥토를 조성한 해창만방조제를 달려 고흥반도와 내나로도를 잇는 나로1대교, 그리고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연결하는 나로2대교를 건너면 나로우주센터가 나온다. 신기하게도 고흥 사람들은 나로도를 ‘나라도’로 발음한다. 나로도의 본래 이름은 나라도였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관리하는 말 목장이 섬 곳곳에 위치한 때문인데 일제 강점기에 지명이 한자로 바뀌면서 음을 따 나로도(羅老島)가 됐다.
여의도 면적의 3.5배 크기인 외나로도는 섬 전체가 절경이다. 나로우주해수욕장 옆에 위치한 봉래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로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다. 나로우주센터 입구에 위치한 봉래산(410m)은 30m 높이의 삼나무와 편백나무 3만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외나로도 서쪽에 위치한 외초리의 염포자갈해수욕장은 파도가 들고 날 때마다 구르는 몽돌 소리가 천상의 연주회를 연상하게 한다.
고흥반도 서쪽에도 볼거리가 즐비하다. 77번 국도변에 위치한 남양면의 중산리는 일몰이 아름답다. 도로변에 위치한 중산일몰전망대 앞으로 우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득량만을 향해 징검다리처럼 뻗어 나간다. 해질녘 붉게 물든 갯벌에서 뻘배에 의지해 꼬막을 채취하는 아낙들은 한 폭의 그림. 벌교꼬막의 유명세 때문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흥은 우리나라 최대의 꼬막 생산지이다. 꼬막이 가장 맛있는 때는 바닷물이 차가워지는 이달부터.
도덕면 용동리에서 두원면 풍류리까지 득량만에 2873m 길이의 방조제를 쌓아 만든 고흥호는 겨울철새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았다. 바다에서 담수호로 바뀐 고흥호에는 누렇게 탈색한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호수 한가운데서는 고니를 비롯해 청둥오리 등이 한가롭게 자맥질을 하고 있다. 해질녘 자전거를 타고 일직선으로 뻗은 고흥방조제를 달리다 보면 가창오리 수만 마리가 바다처럼 넓은 호수와 갈대밭을 배경으로 화려한 군무를 선보이는 장관도 만나게 된다.
고흥반도 서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도양읍의 녹동신항은 제주도를 비롯해 다도해의 섬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쾌속선으로 제주도가 2시간 거리인 녹동신항은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남해안의 물류 거점이자 맛집들이 밀집한 별미의 항구도시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든 소록도는 물론 ‘박치기 왕’ 김일의 고향인 거금도까지 연륙교와 연도교로 연결돼 자동차로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녹동항과 가까운 야산 정상에 우뚝 솟은 고흥우주천문과학관은 별과 다도해가 만나는 곳으로 보성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 북쪽으로는 해무에 싸여 더욱 신비로운 득량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남쪽으로는 소록도 거금도 시산도 금당도 금일도 생일도 등 다도해의 섬들이 중중첩첩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고흥우주천문과학관에서 만나는 일몰은 특별하다. 시시각각 고도를 낮추던 태양이 강진 천관산에 걸릴 때쯤 강진 바닷가에서 고흥우주천문과학관 아래 바다까지 직선거리로 12㎞ 길이의 황금색 띠가 형성된다. 이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도 찍듯 검은 실루엣의 어선 한 척이 황금띠 속으로 들어와 보성만의 일몰 풍경을 완성한다.
고흥=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유자향에 취하면 바다도 예뻐진다
입력 2014-12-04 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