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곽효정] 할머니와 마트료시카

입력 2014-12-03 02:30

어느 날 할머니가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료시카를 가져왔어. “인형 안에 인형이 있는 신비로운 물건이란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렴.” 아이는 제일 큰 인형을 열었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큰 인형 안에 더 많은 것을 넣을 수 있잖아요?” 속상해서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어. 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단다.”

이번에 아이는 제일 작은 것을 골랐어. 그 안에 더 작은 인형이 있었고 또 그 안에 더 작은 인형이 있었지.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마지막에 손톱만 한 마트료시카가 나왔어. “왜 이렇게 이상한 인형을 사오셨어요?” 아이는 큰 것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못내 이상했거든. 할머니는 오래된 일을 기억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어. “젊을 때 이 할미는 크고 화려한 것만 선택했단다. 때로 그 안이 텅 비어 있어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크고 화려한 것을 고집했지.”

졸업식 때마다 할머니는 무겁고 둔탁한 만년필을 선물로 들고 왔어. 조금 큰 아이는 요즘 누가 그런 걸 쓰냐고 투덜댔지. 이미 편리하고 예쁜 펜들이 많이 있었던 거야. “우리 손녀, 만년필 잘 쓰고 있어?” 할머니가 물으면 “촌스럽게 요즘 누가 만년필을 써” 하고 대꾸했어.

그때 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어. “글을 쓸 땐 만년필로 쓰면 좋단다. 잉크를 채우잖아? 그건 마음을 채우는 일과 닮았거든. 그러니 한 단어를 쓰더라도 만년필을 사용하면 허투루 쓸 수 없단다.”

어렸을 땐 할머니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어. 선물 받은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사라졌고 마트료시카 인형에도 이내 흥미를 잃었으니까. 그땐 몰랐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내가 멀리 있을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어. 마지막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지. 너무 늦게 돌아왔거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서야 그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어. 이젠 마음을 담는 글을 쓸 땐 잉크를 채우고 어려운 선택을 할 땐 마트료시카를 생각해. 그러면 혼잣말처럼 했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라.

“이 할미 젊을 때도 마트료시카 같은 게 있었더라면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까.”

곽효정(매거진 '오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