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현대사 헤치며 가족 건사한 70대 아들의 독백 “아부지, 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입력 2014-12-03 02:58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황정민이 노인 분장을 한 채 부산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모습. 황정민은 20대 청년부터 70대 노인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덕수를 애틋하게 연기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추억을 되살리는 장면에서 웃음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오는 17일 개봉되는 영화 '국제시장'은 126분 동안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6·25전쟁, 파독 광부,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상봉 등 한국 현대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영화는 어렵고 힘들게 살았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다. 할리우드 영화가 점령한 극장가를 '국제시장'이 장악할 수 있을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람 포인트를 소개한다.

◇5년 만에 복귀한 윤제균 감독=부산 국제시장은 “사람 빼고 다 외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미국 수입품 등으로 한때 전성기를 누렸다. 관객 1145만을 동원한 ‘해운대’(2009) 이후 5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윤제균 감독이 ‘국제시장’을 선택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부산이 고향인 윤 감독은 “국제시장은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의 눈물겨운 공간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피란민 10만명이 아우성치는 초반의 흥남철수작전이 실감난다. 배에 올라타려는 절박한 심정의 사람들 와중에 끝내 아버지와 막내딸을 잃어버리는 덕수(황정민) 가족의 이야기가 거대한 스케일 속에 잘 녹아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독일과 베트남으로 떠나야만 했던 덕수의 파란만장한 삶이 애틋하게 전개된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대중적으로 드러내는 윤 감독의 연출 솜씨 덕분에 가능했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연기한 황정민=‘너는 내 운명’(2005)에서 한 여자만을 향한 순애보를 과시하고, ‘신세계’(2012)에서 의리와 냉철한 카리스마를 겸비한 조직의 2인자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황정민. 이번에는 20대 순박한 청년부터 70대 고집쟁이 할아버지까지 변신을 거듭했다. 그는 배역에 대해 “이 땅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연기한 것은 처음이라는 그는 “20대부터 40대까지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지만 70대는 아직 겪어보지 못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노인의 행동과 말투를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변해가는 덕수를 잘 표현했다. 그의 노인 분장은 ‘007 스카이폴’의 스웨덴 특수 분장 팀이 맡았다. 7개의 얇은 얼굴 본을 떠 자연스럽게 구현했다.

◇아련한 추억 전하는 시대의 아이콘=부산 피란 시절을 보낸 유명 인사들이 영화 중간 중간에 양념처럼 등장한다. 젊은 시절의 정주영이 나오고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김봉남이라는 본명으로 등장한다. 씨름선수 이만기의 학창시절 모습이 등장하고 베트남 전쟁 장면에서는 가수 남진이 전투에 참가해 ‘님과 함께’를 부른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남진은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맡았다.

그때 그 시절의 음악도 들려준다. 흥남철수 때 헤어진 금순이를 주제로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 덕수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부 영자(김윤진)가 신랑 친구들의 장난에 마지못해 부른 한명숙의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주제곡으로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이 영상을 타고 흐른다. 국기하강식도 추억의 장면이다.

◇빛나는 조연과 명대사들=황정민의 둘도 없는 친구로 나오는 오달수의 코믹연기는 압권이다. 오달수의 아역도 코 옆의 점까지 똑같이 닮아 폭소를 자아낸다. 황정민의 부인 영자 역을 맡은 김윤진은 때로는 청순하면서도 때로는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 역의 정진영, 어머니 역의 장영남, 고모 역의 라미란 등 탄탄한 연기력과 개성을 갖춘 배우들이 환상의 앙상블을 선보인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굴곡의 삶을 살아온 덕수에게 영자가 말한다. “이젠 당신을 위해서도 좀 살아요.” 덕수가 답한다. “전쟁이고 가난이고 내 자식이 겪지 않고 내가 대신 겪었으니 이거면 됐다.” 온 가족이 화목하게 둘러앉아 있는 가운데 혼자 빠져나온 덕수가 끝내 만나지 못한 아버지에게 하는 말. “아부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세대 간의 이해와 소통이 영화의 주제다. 12세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