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의구] 예산안 처리 합의, 다음은?

입력 2014-12-02 02:30

여야가 2015년도 예산안을 법정시한 내 처리키로 합의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사회 각 분야 중에서 가장 ‘지질한’ 부문으로 치부되던 정치가 탈바꿈하는 계기가 될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에 처리토록 규정한 것은 행정규칙이나 법률이 아니라 법체계의 맨 위에 있는 헌법이다. 54조 2항에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중앙 및 지방 정부가 세부 예산집행 계획을 세워 차질 없이 업무를 지속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한 것이다.

국회가 1987년 개헌 이래 26차례 예산안을 의결하면서 기일을 지킨 것은 6차례에 불과하다니 헌법 무시가 도를 넘었다. 9월 초 개회 후 100일 이내로 돼 있는 정기국회 마감일까지도 통과시키지 못해 임시국회를 소집하는 게 다반사였다. 작년과 재작년엔 아예 해를 넘겨 1일 새벽에 처리하는 나쁜 선례까지 남겼다. 입법기관부터 법을 어기고 나서니 우리 사회 전반에 법과 원칙이 똑바로 설 도리가 없다. 헌법 54조가 선언적 규정이든 강제적 규정이든 헌법을 지키는 게 공직자의 기본 책무다.

헌법 무시 관행 탈피 박수받을 만해

그런 점에서 정치권의 이번 결단은 칭찬받을 만하다. 예산안 합의에는 여야 원내대표단의 노력이나 정의화 국회의장의 확고한 의지, 시한이 지나면 예산안을 자동 상정토록 한 국회선진화법 등이 공신이다. 특히 세월호 특별법 협상 때문에 예산 심의 자체가 늦어졌는데도 어렵사리 합의에 응한 야당이 수훈 갑이다. 우윤근 원내대표의 노고가 컸을 것이고, 문희상 비대위원장의 묵직한 내공이나 정치철학도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제는 시한을 지키는 관행을 굳히고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예산안 심의·의결은 야당이 쥐는 유력한 카드 중 하나다. 예산안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정부와 여당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시간은 야당의 편이다. 예산과 별 관계 없는 쟁점 법안들이나 정치 현안을 연계하면 관철시키는 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하지만 나라살림을 볼모로 잡은 책임은 야당에도 돌아온다.

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단물에 익숙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차별적 폭로나 네거티브 공세로 정부를 흔들고, 별건 사안을 정치적으로 묶는 연환계로 여당을 압박하면 기세를 올릴 수는 있겠지만 의외로 지지율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정당의 수권 능력은 말초적인 공세에 있지 않다.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정치 이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민생 대안, 고단한 실천과 절제된 정치력을 통해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 이번 예산안 처리를 놓고 야당이 보여준 성숙한 모습은 전당대회 후 새로 꾸려질 야당 지도부에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정윤회 파문'도 역지사지로 매듭짓기를

연말을 목전에 두고 ‘정윤회 파문’이 불거져 예산 고비를 갓 넘은 정치권에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여야의 대응 방식은 실망스럽다. 여당은 청와대를 감싸고 파문 확산을 막기에 진력하는 모습이고, 야당은 자극적인 표현으로 부채질을 하는 형국이다. 여당은 청와대 내부 문건이 유출된 경위에 초점을 맞추고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야당은 유출 경위보다 문건에 나타난 국정 농단의 실체를 우선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도 틀린 지적이 아니다. 특정인, 특정세력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된다는 지적이 나왔다면 진위를 철저히 규명해 잘못된 부분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기강이 추상같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내부 문건이 외부로 흘러나간 문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문제는 여당이 스스로를 향해 채찍을 들지 않으려고만 하고, 야당은 폭로를 위한 폭로에 매달리는 경우다. 예산안 합의로 새 모습을 보여준 우리 정치가 이번 파문도 상대를 존중해가며 국민들의 박수를 받는 방향으로 제대로 매듭짓기를 바란다.

김의구 편집국 부국장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