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3) 제물포와 조선의 정착

입력 2014-12-02 02:32
1880년대 말 제물포의 외국인 거류지 전경. 멀리 서구 열강의 기선이 정박하고 있다. 가운데는 아펜젤러가 머물렀던 대불호텔.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미국에서 유행했던 스미스 오르간으로, 아펜젤러가 제물포 입항 시 가져왔던 모델과 유사하다.
1885년 4월 2일, 주한 미국 대리공사 조지 포크는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갑신정변의 여파로 한국 내 정세가 불안해 선교사업의 타진도 어렵고 신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니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될 때 다시 알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외교 정세에서는 어떤 미국인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편지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에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주한 미국 공사관에서도 이들의 입국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처럼 선교 시작부터 외교적 차원의 보호가 부재했던 것은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아펜젤러를 맞이하는 제물포항 분위기는 분주했다. 따뜻한 환영 대신 일꾼들이 나와 이들의 짐을 날랐다. 독신으로 왔던 언더우드와 달리 아펜젤러는 그의 아내를 챙겨야 했다. 아내가 임신해 신변 안전에 만전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운영하는 대불(大佛·Diabutsu)호텔에 머물렀다.

1885년 4월 6일,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기선 오시피의 선장 맥글렌지는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는 아펜젤러 부부를 방문했다. 그는 신변이 염려돼 아펜젤러 부부의 서울 입성을 만류했다. 더욱이 아펜젤러의 아내 엘라 아펜젤러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맥글렌지는 서울에 있는 주미 대리공사 포크에게 안전에 대해 급하게 서신을 보냈고 당일 답신을 받았다. 서울은 정세가 매우 불안하기 때문에 입국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식 입국 절차로는 미국인의 서울 입성이 불가한 것이다.

그렇게 제물포에 도착해 이틀이 지나갔다. 타국인 영사 중에서는 일본영사 고바야시가 이들을 가장 먼저 환대했다. 이어 영국의 스코트 영사가 방문했고 선교가 아닌 교육적 목적으로 서울 입성이 가능 하다는 대화가 오고 갔다. 아펜젤러가 타국 영사 두 명을 만나 느꼈던 감정은 다음과 같았다. “맥글렌지를 만났던 어제는 우리의 감정이 엉망이었지만 오늘 밤 두 손님을 맞으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한국 선교의 좌절

한국에 입국한 지 며칠 지나 4월 10일이 되었다. 언더우드가 서울 입성을 강행해 알렌과 함께 있는 동안 맥글렌지 선장은 아펜젤러 부부에게 “서울 입경은 가능하지만 생명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임신한 부인이 걱정된다”는 입장을 펼쳤다. 후일 엘라 아펜젤러가 남긴 글을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서울 입경에 내가 짐이 되었다. 나 없이 그이(아펜젤러)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이는 자신의 신변에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나와 아기에 대해서는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의 아내의 안전뿐 아니라 선교를 강행하다 선교의 문이 닫히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결국 아펜젤러는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가 한국 선교를 위해 보다 철저히 준비하기로 한다.

이후 아펜젤러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목사 선교사보다는 의료 선교사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885년 4월 30일 스크랜튼을 먼저 파송했다. 스크랜튼은 가족을 홀로 남겨 두고 단신으로 한국에 도착해 1885년 5월 3일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아펜젤러 부부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의 심경을 알 수 있는 편지가 남아 있다. 아펜젤러가 웨더스(Wadworth)라는 친구에게 쓴 편지인데 “한국에 도착하여 성공적이지 못한 선교 성과로 깊은 실망과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소망이 모든 것을 최선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한국 선교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나가사키의 해외 여성 선교부(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에서 교육 사역을 배우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공부했다. 또 학생이 없던 기독교학교를 도와주면서 100여명의 학생을 모으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인에 대한 영감을 가지게 된다. 일본과 중국 문화를 배우고 있는 그에게 동북아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위치와 저력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무대가 되었다. 일반 서구인들이 ‘한국인은 게으르고 무능하다’고 평가했던 것과는 달리 아펜젤러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했다. 그 저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선교의 두 번째 시도

1885년 6월 10일,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스크랜튼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한국 정세가 안정되었으니 들어와도 된다는 편지였다. 1885년 6월 16일,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 부부(Dr. and Mrs. Heron)는 나가사키를 출발해 6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하게 된다. 스크랜튼은 가족을 위한 거주지를 마련했던 반면, 아펜젤러가 서울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해리스호텔이라는 곳에 머물렀지만 하루에 2달러의 호텔비가 아까워 한 달에 25달러 하는 초가집에 거의 한 달간 임시 거주했다. 1885년 7월 7일, 아펜젤러는 화물로 도착한 오르간을 펼쳐 ‘만복의 근원 하나님’ 등 찬송을 연주했다. 그가 기도로 고백하였던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오르간을 통해서 찬양으로 한국 땅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