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가 있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북쪽을 택해 언덕을 올라가면 재벌이 운영하는 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 리움을 만날 수 있다. 반대로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골목길에 들어서면 명품 컬렉션은 아니지만 여기에 반기를 드는 듯한 전혀 새로운 경험이 기다린다.
지난 28일 국내·외 건축가 7명의 작품전 ‘건축적 랩소디’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대안공간 ‘아마도 예술공간’을 찾았다. 도무지 전시장 같지 않은 곳이다. 허름한 3층짜리 슬라브 상가주택을 개조했다는데 과거의 방과 방, 부엌 등이 그대로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시멘트 바닥과 부엌의 타일, 보잘 것 없는 창문, 조그만 다락 등이 손보지 않은 채 그대로다. 30여 년 전 쌀집과 중국집, 꽃집 그리고 누군가의 가정집이었다는, 개발시대 이태원 특유의 주택 형태임을 눈치 챌 수 있다. 마치 이사를 가고 난 빈집의 방과 방들에서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아마도 예술공간’은 이렇듯 지리적 위치 뿐 아니라 과거를 헐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건축가들의 작품인 리움의 대척점에 있다. 사각의 흰색 전시공간, 즉 ‘화이트 큐브’가 여전히 한국에선 대세인 상황에서 대안공간으로서의 문법을 갖춘 셈이다.
건축전이지만 으레 상상되는 설계도면이나 모형의 전시가 아니다. 건물을 짓던 건축가들이 주체 못하는 예술적 끼를 발휘해 실험적인 예술작품을 풀어놓았다. 그래서 전시제목도 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로운 악장으로 연주되는 랩소디를 차용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옥상의 공간과 유리 가건물 안에 쌓아둔 스티로폼 조각이 작품이다. 도시구조물을 상징하는 듯한 스티로폼 더미는 바퀴에 잉크를 묻힌 ‘리모콘 카’가 만들어낸 흔적으로 온통 시커멓다. 김찬중(45)의 ‘놀리 맵 플레이어’인데 현대 지도의 창시자인 14세기 이탈리아 지도 제작자 잠바티스타 놀리의 지도 이미지를 차용, 도시의 구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상상을 관람객에게 맡긴다.
장윤규(50)·김미정(29)의 합작품인 ‘몽유도원도 타워’는 도시 빌딩 숲에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산수를 초현실적으로 배치해 인공자연도시를 제안한다. 유화도, 드로잉도 아닌 디지털프린트가 커다란 창문 위에 테이프로 붙여져 있을 뿐이다. 최문규(53)의 ‘둥둥’은 검은 방에 공간을 꽉 채운 크기의 검은 애드벌룬을 매단 것이다. 비어 있는 공간을 ‘가볍게’ 장악하는 방식은 역발상의 즐거움을 안긴다.
켄민성진(50)은 폐차의 부품을 말 형상 조각으로 재탄생시켰다. 기능에 충실했던 것들에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다. 스페인 작가는 한국에서 낯선 경험이었던 셀카봉을 활용한 설치 작품을, 일본 작가는 한국에선 사라진 전통이 되어버린 목조 건축의 따스함을 환기시키는 구조물을 내놓았다. 각각의 작품은 계단을 내려가거나 좁은 복도를 지나야 나오는 방 하나하나를 꿰찼다. 여러 작가의 작품을 쏟아 넣는 대규모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는 창출할 수 없는 매력이다.
이곳에는 미술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최정화씨의 ‘스페이스 꿀’이 자리했다. 지난해 6월부터 주인 박혜성 대표(56·이화여대 공간디자인 전공 겸임교수)가 직접 나서 ‘아마도 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박 대표는 “그동안은 순수미술을 전시했으나 앞으로 건축전을 비롯해 디자인, 사진, 패션 등 비주류 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대안공간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10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이게 전시장이야?”… 허름한 방을 채운 건축가들의 ‘끼’
입력 2014-12-01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