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빵집 매출 ‘빵’ 터졌다… 골리앗에 맞선 정은진씨의 ‘빵生빵死’

입력 2014-11-29 02:15
빵 마니아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빵생빵사'를 운영하는 정은진씨(가운데)가 26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빵집에서 제빵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구성찬 기자

일요일인 지난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골목길에서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작고 낡은 벽돌건물 앞에 100여명이 길게 줄을 섰다. 앳된 얼굴의 여고생, 딸아이 손을 잡고 온 중년 여성, 잔뜩 멋을 낸 남학생 무리 등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더블치즈’ ‘곰카레’ ‘돼지당근’ 등 암호 같은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차례차례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빵생빵사(빵生빵死) 자선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2만2000원을 내면 10여개 빵집에서 만든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 빵값은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3년 전 시작돼 올해가 세 번째인 이 행사는 정은진(35·여)씨가 기획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며 빵맛이 어떨까만큼 궁금했던 건 그의 정체다. 빵을 무지하게 좋아하지만 만들 줄은 모르고, 매일 블로그에 빵집 이야기를 쓰는데 빵집을 운영하는 것은 또 아니라고 한다.

온라인에서 ‘빵 먹는 정낭자’로 통하는 처녀, 별다른 직업 없이 몇 년간 빵 먹으러 다녔더니 서울시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찾아왔다는 그를 26일 낮 서울 홍익대 인근의 한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다시 만났다.

◇동네빵집 사장님들의 구세주=그는 대뜸 “근처에 단팥빵이 되게 유명한 집이 있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정씨가 앞장을 섰다. 혼자서는 절대 못 찾아올 것 같은 주택가 골목을 굽이굽이 걸어가니 촌스러운 초록색 간판의 작은 빵집이 나타났다. 빵 반죽을 만지던 직원은 그를 보자마자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여간한 단골이 아닌가보다’ 싶었다. 곧이어 정씨의 ‘단팥빵 예찬’이 시작됐다. “이삼일만 되면 곰팡이가 피어요. 방부제를 안 쓰거든요. 군산의 그 유명한 빵집 알죠? 셰프님이 거기 출신인데, 솜씨가 장난이 아니에요. 팥이 안 달고 고소한 게 진짜 대박이에요.”

정씨의 강력한 추천에 결국 단팥빵을 샀다. 팥 앙금이 꽉 찬 어른 손만한 빵이 1300원. “이렇게 팔아서 장사가 되느냐”고 묻자 정씨는 “동네 구석에 있어서 임대료가 덜 들 것”이라고 했다.

정씨는 전국 동네빵집 사장님들 사이에서 인기 스타다. 포털 사이트에서 3년 연속 파워 블로거로 선정되기도 했다. 빵 좀 먹어봤다는 사람들도 정씨 블로그(정낭자의 bread & dessert 소믈리에) 앞에선 혀를 내두른다. 구멍가게조차 없을 것 같은 골목의 숨겨진 빵집들을 찾아내 후기를 올린다. 얼굴을 알아보는 사장님이 생길 정도로 제법 이름이 났지만 모든 빵은 직접 돈을 내고 산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던 동네빵집 여러 곳이 정씨 블로그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살아났다.

정씨가 본격적으로 빵 블로그를 시작한 건 2011년이다. 유학생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정씨의 언니는 소일거리로 동네 꼬마들에게 제과·제빵을 가르쳤다. 언니는 “미국 빵들은 다 못생기고 투박하다”고 자주 볼멘소리를 했다.

당시는 한국에서 한창 디저트 열풍이 불 때였다. 정씨 인생의 최대 방황기이기도 했다. 그는 2010년 11월, 10년을 다녔던 외국계 가전 회사를 뛰쳐나왔다. 겨우내 차를 끌고 제주도 곳곳을 돌았다. 이어 혼자 살던 강남의 원룸을 정리하고 은평구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삶이 너무 무기력하고 지루해 견딜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부모님의 눈초리는 따가웠다. 저녁 대신 사먹는 빵이 유일한 낙이었다.

◇빵 마니아, 골목상권을 살리다=언니에게 우리나라의 예쁜 빵 사진들을 보여주려 블로그를 만들었다. 백수라서 시간이 많았다. 여행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동네빵집을 찾아냈다. 직접 맛을 보고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 올렸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어느덧 정씨의 블로그는 빵 마니아들이 소통하는 집합소가 됐다.

그는 “이쯤 되니 블로그를 넘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빵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빵에 죽고 빵에 산다’는 뜻의 온라인 카페 ‘빵생빵사’를 개설했다. 순식간에 회원 수가 1만4000명을 넘어섰다.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동네빵집을 찾아가 빵을 사먹고 카페와 각자의 블로그에 후기를 남겼다. 빵집 사장님들로부터 “힘이 난다” “고맙다”는 메시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범람하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들 사이에서 동네빵집이 틈새를 비집고 경쟁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구석진 골목에 있어 손님의 발길이 닿지 않고 망하는 곳이 많았다. 정씨가 좋아하던 빵집들도 임대료와 불황을 이기지 못해 여럿 문을 닫았다.

고민 끝에 그가 만들어낸 게 ‘서울 빵 지도’다. 지하철 노선도를 따라 서울의 ‘숨은 고수’ 빵집을 나열했다. 이 지도를 한 장당 3800원에 인터넷으로 팔았는데 벌써 1차로 인쇄한 1500장이 다 팔렸다. 그는 “배송비와 인쇄비, 교통비를 빼면 적자 수준이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싶었다”고 했다. 이를 눈여겨본 서울시에서 “빵 지도를 스마트폰 앱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전국 동네빵집을 소개하는 책을 쓰자”는 출판사 제의도 들어왔다.

정씨는 요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의 블로그에는 여전히 “돈을 받고 홍보글을 써 주는 게 아니냐”는 악성 댓글이 달린다. 그는 “사람인지라 그런 댓글을 보면 마음이 저리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