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스라는 아이가 두 컵 분량의 세제를 마신 채 병원에 실려 왔다. 실수로 마셨다고 보기엔 많은 양이었다. 특수수사대 앨리엇 형사는 아이 엄마인 캐런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캐런이 입양한 알렉시스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고모의 진술이 있었다. 재판에 넘겨진 캐런이 혐의를 부인하자 앨리엇 형사는 ‘사건 조사자’ 자격으로 증언대에 서서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유죄 가능성을 적극 진술한다.
1990∼2010년 방영된 미국 인기 드라마 ‘로 앤 오더’의 한 장면이다. 미국 사법체계의 모습을 그린 이 드라마는 법정에서 경찰의 역할을 강조한다. 법정 공방 장면이 많은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증인이 경찰이다.
미국 사법제도는 형사사건에서 경찰을 ‘첫 번째 목격자’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경찰의 법정 증언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검사가 사전에 경찰관을 면담해 증언을 준비하는 관행도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도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경찰 조사 과정에서 유죄를 인정한 피의자가 재판에 넘겨진 뒤 이를 번복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2008년 ‘조사자 증언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7년째 운용상의 한계를 드러내며 헛바퀴만 돌고 있다. 재판에 불려나온 경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이 제도에 대한 검사 변호사 판사의 시선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달 22일 김형식 전 서울시의원의 ‘재력가 청부살인 사건’ 3차 공판이 열린 서울남부지법. 김 전 의원을 직접 조사했던 서울 강서경찰서 강력2팀 김모 경사가 법정에 증인으로 섰다. 김 전 의원은 조사 과정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 내용을 모두 부인한 상태였다. 검찰에 송치된 뒤론 줄곧 묵비권을 행사해 왔다. 검찰은 김 전 의원을 조사한 김 경사를 법정에 세워 그 신문조서의 신빙성을 알릴 생각이었다. 김 경사는 형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증언대에 섰다.
증인 신문이 시작되자마자 김 경사의 증언은 벽에 부딪혔다. 김 전 의원 변호인은 “이의 있습니다”를 외친 뒤 “경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피의자가 부인하게 되면 증거 능력이 없는데 조사한 경찰관을 불러 똑같이 읊게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했다. 검사가 즉각 “그래서 조사자 증언제도가 있는 것”이라며 반박했지만, 재판장은 “(조사자 증언제도가) 논란의 여지도 있고 아직 체계적으로 확립이 안 돼 있다”며 변호인 의견을 받아들였다. 김 경사는 증언은 하지도 못한 채 앉은 지 10여분 만에 일어나야 했다.
형사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한 변호사는 “2000여건 형사사건을 진행하면서 조사자 증언제도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몇 번 신청해본 적은 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피고인의 진술 번복이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이 제도가 효율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로고스 최진녕 변호사는 “재판에서 피고인이 부인해 버리면 경찰의 신문조서는 휴지조각이 된다”며 “피고인이 반발하더라도 부인한 내용을 조사자를 통해 듣는 게 실체적 진실 발견에 필요하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법원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기획] 7년째 헛도는 ‘조사자 증언제도’ 증인석 불려나온 경찰관만 뻘쭘
입력 2014-11-29 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