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금융실명제 강화 D-1… “통장 삽니다” 신종 사기 주의보

입력 2014-11-28 03:45 수정 2014-11-28 07:58

‘주류업체의 세금 절세 차원에서 휴면계좌를 빌리고 있습니다. 대여료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A씨(38)는 26일 이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세무법인’ 직원이라고 소개한 발신자는 “주류업체의 세무회계를 담당하고 있는데 소득 신고액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며 “사용하지 않는 계좌를 빌려주면 200만원 정도 드리겠다”고 설명했다.

흔한 대포통장 사기라고 생각했던 A씨에게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메시지 하단에 ‘계좌를 빌리는 기간은 3∼5일이면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진짜 며칠만 빌려주면 200만원 줄까?’ A씨는 호기심에 문자메시지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받은 사람은 “수금이 월말에 몰리는 특성상 이번 주 금요일(28일)까지 급하게 필요하다. 은행 카드와 신분증이 있으면 지금 당장 퀵서비스를 보내드리겠다”며 “꼭 이번 주에 필요하다. 다음 달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자칭 세무법인 직원이라는 그는 주류업계의 속사정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다시피 했다. 노점상이나 영세 자영업자 등 사업자등록증 없이 술을 파는 곳과는 현찰로 무통장 입금하거나 친인척 명의 통장을 이용해 거래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차명계좌 사용을 한층 엄격하게 규제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이 29일부터 시행되면 이런 ‘절세’(실제로는 탈세)를 하기 어려워 부득이 계좌를 ‘단기간’ 빌리려 한다고 설명했다.

차명계좌로 거래를 하기 어려워지니 불특정 다수의 계좌를 이용해 돈을 받고 인출하는 일종의 ‘돌려 막기’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사업자 통장이나 법인 통장을 이용하면 애꿎은 세금을 내게 되니 차라리 계좌를 잠깐만 사용하고 사용료를 드리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은행 감시체계도 꿰뚫고 있었다. 금융회사는 한 고객이 하루 2000만원 이상 현금을 입출금하거나 1000만원 이상 현금 거래 중 자금세탁이 의심되는 경우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한다. 이런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소액으로 분산 입금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 사는 B씨(53·여)도 지난 3일 한 ‘투자회사’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회사의 세금 감면에 쓰일 은행 계좌를 빌려주면 월 200만∼50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친구의 휴대전화를 빌려 전화를 걸자 대뜸 “휴대전화를 두 개 쓰시냐”고 되물었다. 발신자 전화번호가 본인들이 가진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번호란 거였다.

꼼꼼한 ‘고객 관리’에 B씨는 솔깃했다. ‘△△투자회사’ 직원이라고 밝힌 이 사람은 “계좌를 불법적으로 사용하려는 게 아니라 회사 매출을 세무서에 신고되지 않게끔 자금을 돌려받는 용도”라며 “(계좌 대여를) 진행하시는 분들에 한해서 저희 회사 정보를 팩스로 받아보실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두 계좌 기준으로 400만∼450만원을 제시했다.

개정 금융실명제법 시행을 앞두고 ‘통장을 빌려달라’는 문자메시지가 범람하고 있다. 주로 사업체의 탈세 목적에 쓰는 대신 대여료를 주겠다는 내용이다. “차명거래 처벌을 대폭 강화한 법이 시행되기 전에 영세사업자들을 좀 도와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이들의 정체는 뭘까.

27일 국민일보 확인 결과 A씨가 받은 문자메시지의 ‘세무법인’과 ‘주류업체’는 정식 등록업체가 아니다. 사무실을 공개하지 않고 퀵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것은 대포통장 거래 방식과 유사하다. 한 세무법인 관계자는 “사업자등록증이 없어 주류 판매면허도 발급받지 못한 소규모 거래처와 무자료 거래를 알선해주기 위해 통장을 모집하는 세무법인은 ‘현실적으로’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단기간만 빌려 쓰겠다거나 관리대상 전화번호가 아니라며 경계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수사대 관계자는 “먼저 금융실명제법 개정안 시행 얘기를 꺼내면서 ‘300만∼400만원의 소액으로 여러 계좌에 분산하는 것은 괜찮다’ ‘다음 달부터는 안 된다’는 식으로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을 속이려는 수법”이라며 “전형적인 대포통장 모집책의 양수·양도 방식”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실제 사업체가 통장을 빌리는 것이라고 해도 ‘불법이 아니다’는 설명은 거짓말이다. 절세·탈세용 금융거래 역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에 따른 명백한 불법행위다. 금융 당국의 대책이 시급하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