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달자] 행복을 미루는 한국인

입력 2014-11-28 02:20

며칠 전 후배 A와 점심을 먹었다. 별로 행복할 게 없다는 푸념을 들으며 밥을 먹는 것이 괴로웠는데 그는 대뜸 말했다 “저녁은 또 뭘 먹지?” 내가 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와 함께 밥 먹는 걸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안돼? 내가 별 사람은 아니지만 두어 달 만에 선배와 광화문에서 밥 먹고 세상 이야기 하는 일도 큰 행복이라고. 또 저 밖의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워. 곧 영하로 떨어지기 직전의 광화문 초겨울 모습은 진정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풍경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저녁 걱정? 나는 마음먹은 김에 조목조목 따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안다. 지금 남편과의 문제며 자식 문제며 알 것 같은 게 아니라 너무 잘 안다. 근데 그만큼 가정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마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가 있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모르면 영원히 행복은 없는 것이다. 아이고, 점심 먹으면서 저녁 뭘 먹을까 고민하는 꼴이라니.

한국 어머니들이 곧잘 그랬다. 아이고, 이놈의 세상.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 점심 먹으면서 저녁은 뭘 먹어? 가을 살면서 겨울은 어떻게 살아? 첫딸 결혼시키며 둘째는 언제 보내나? 월급 찾아서 이거 금방 다 달아날 건데 뭐.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행복을 찾는 것, 그게 행복인데 늘 오늘의 행복에 냉대하고 내일 다음 또 내년으로 미루는 행복은 결국 행복의 옷자락도 못 보고 인생 끝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감사합니다가 미온적이고 사랑한다라는 말이 사용 미달일 것이다.

행복은 제 아무리 많이 가져도 본인이 인정하지 않으면 없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감동이나 감격에서만이 아니라 현상유지에서 오는 눈(바라봄)이 중요하다. 격하기 쉬운 사람의 벌은 행복 곁에 살면서도 행복을 손에 넣지 못한다고 했다. 행복은 불러야 온다고 했다. “행복 같은 소리 하지 마라”고 하면 행복은 간다. 귀가 밝은 것이 행복이다. 자잘한 것도 행복하다고 말하라. 그러면 행복은 나의 것이 되지 않을까. 한국인의 행복론은 이쯤에서 더 강력한 자기변화가 필요하다.

신달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