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데 대해 사법부의 일원으로 깊이 사과드립니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영국 역사학자 E H 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 등을 읽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까지 치른 김모(53)씨에게 32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변민선(49) 판사는 82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이 선고됐던 김씨의 재심 공판에서 25일 무죄를 선고하며 이같이 사과했다.
변 판사는 판결문에서 “김씨의 자술서와 신문조서는 불법 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에 의해 작성됐고, 당시 재판 과정에서도 내용이 부인돼 증거 능력이 없다”며 “압수물도 북한과 무관한 출판사가 정상적으로 펴낸 책과 그 복사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사법부가 불법 감금과 가혹행위를 애써 눈감았다. 재심 판결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명예회복의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경희대에 다니던 81년 6월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함께 북한을 찬양·선전하고 이를 위한 표현물을 취득했다는 혐의로 영장도 없이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고(故)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됐던 곳이다.
김씨는 고문과 협박에 “이적활동을 했다”고 진술했고, 검찰은 이를 토대로 기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김씨가 진술을 번복해 압수된 서적만 증거로 제시됐지만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됐다. 당시 수사 당국이 문제 삼은 서적은 E H 카의 ‘러시아 혁명사’ ‘볼셰비키 혁명’, 모리스 도브의 ‘자본주의의 어제와 오늘’, 에리히 프롬의 ‘사회주의 휴머니즘’ 등 석학들의 유명 서적이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역사란 무엇인가’ 읽었다고 고문·옥고… 32년 만에 무죄
입력 2014-11-26 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