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때는 언제였을까.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세종대왕 시절이라고 한다면 대개는 수긍할 것이다.
세종대왕의 문화정책의 출발은 바로 집현전이었다. 집현전 출신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고, 다양한 역사서와 연구 서적을 저술했다. ‘고려사’ ‘속육전’ ‘신찬팔도지리지’ ‘향약집성방’ ‘동국정운’ 등이 바로 그러한 저술이다.
세종대왕은 음악 부문에서도 획기적인 성과를 냈다.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우리의 음악을 확립했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을 제조했다.
이런 문화 강국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 바로 1442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제작한 ‘비해당소상팔경시첩’(보물 제1405호)이다. 이 시첩은 12세기 초 고려 명종 때의 시화회(詩畵會)를 계승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이 그림을 그리고,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 주축이 된 19명의 문신들이 대거 참여하여 완성했다. 이 시첩에서 자신감을 얻은 안평대군은 5년 후 ‘몽유도원도’를 제작한다. 이 ‘몽유도원도’는 조선이 유교적 이상국가라는 문화적 자신감의 절정에서 나온 걸작 중의 걸작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보에 주력한 세종
이러한 조선 초기의 문화융성은 삼국시대와 고려조에 이르는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 시절 단군 사당에 봉사(封祀)하고 삼국의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세종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그 뿌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종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보에 여념이 없었고 그것이 문화융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많은 분야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러 무형, 유형의 문화유산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만으로 그 공간을 축소해서 보자. 숭례문과 경복궁이 없는 서울을 상상할 수 있을까? 많은 서울시민이 실감을 못 하겠지만 서울에는 조선의 건축물과 같은 유형유산뿐만 아니라 45개 종목의 무형문화재도 있다. 이 무형문화재 중에는 칠장(漆匠)이나 자수장(刺繡匠) 같은 공예 종목도 있고, 민속놀이나 음악이나 굿 종목도 있다.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원에 인색한 서울시
이런 무형문화재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들 무형문화재 종목 보유자들에게 매월 지급하는 전승지원금이다. 전승지원금은 보유자들의 생계 유지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당근이 되어 이들의 기예를 배우려고 하는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전승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2013년과 2014년에 새롭게 지정이 된 무형문화재 종목 중에서, 예컨대 ‘삼현육각’이나 ‘한량무’ 보유자들은 현재 한푼의 전승지원금도 못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서울시가 예산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재정자립도가 서울시보다 훨씬 못한 다른 시·도들도 다 전승지원금을 지급하는데 서울시만 예산이 없다? 이러한 어불성설은 예산 문제가 아니라 단적으로 말해 서울시가 행정의 경직성 혹은 무형문화재에 대한 인식 부족을 자임하는 것이다.
무형문화재 보호와 전승에 관한 좋은 소식도 있다. 이북5도위원회가 지정한 무형문화재 13개 종목은 그동안 한푼의 전승지원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새정치민주연합 임수경 의원이 지난 10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감에서 정종섭 안행부 장관에게 제기하자 장관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에 임 의원이 주도해 안행위 예산에 이북 5도 무형문화재 전승지원금 항목을 반영했고, 예결위에서 확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조상이 남긴 우리의 유·무형문화재를 보호하고 전승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사명이다. 그러한 것도 돌보지 못하면 우리는 애초부터 문화융성을 말할 자격이 없다.
하응백(문학평론가·휴먼앤북스 대표)
[청사초롱-하응백] 문화융성 말할 자격 있나
입력 2014-11-26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