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이맘때면 ‘사랑의 온도탑’이 세워진다. 올해도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기부, 사랑의 시작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100도를 향한 연말연시 이웃돕기 모금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진행하는 올해 모금 캠페인은 내년 1월 31일까지 73일간 전국 17개 시·도 지회에서 전개되며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약 5% 늘어난 3268억원이다. 이에 앞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지난 12일 서울 중구 사랑의열매 회관에서 16주년 기념식을 열고 ‘올해의 기부왕’ 대상 시상식을 가졌다. 캠페인을 앞두고 기부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올해 주인공은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82) 화백이다. 김 화백은 지난해 11월 1억원을 선뜻 내놔 만화가로는 처음으로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또 평생 쓴 100여권의 책 인세를 사후 기부하기로 서약해 공동모금회 유산기부 회원 모임인 ‘레거시 클럽(Legacy Club)’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시사만화를 상징하는 고바우 영감을 탄생시킨 그를 17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기자를 보자 대뜸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찾아 오냐”며 자신의 기부 소식이 크게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기부문화와 고바우를 얘기할 때는 목소리에 활력이 넘쳤다.
-1억원은 어떻게 기부하게 됐는지.
“그림을 판매해 만들어진 돈이다(김 화백은 고바우 영감 연재를 마친 뒤 1·4후퇴 등 한국전쟁 스케치와 풍속화에 몰두해 왔다). 평소 불우한 사람들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고 항상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지난해 11월 기회가 돼서 기부하게 됐다. 남들도 다 하는 기부라 특별한 것은 없다. 나보다 더 여유 있는 분들에게 자극이 돼 기부문화가 확산됐으면 좋겠다.”
-기부에 대한 평소 생각은.
“많은 사람이 돈을 더 벌어 형편이 나아지면 기부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평생 기부 한 번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외국에서는 재산의 상당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국내엔 아직 그런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우리의 기부문화는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기부에 더 앞장서야 한다.”
-사후 기부도 서약했는데.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아닌가.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고바우 영감 저작권을 비롯해 100여권의 책 인세를 사후 기부하기로 했다.”
-고바우 영감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
“고바우 영감이란 캐릭터가 탄생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때다. 북한군이 길거리에서 젊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의용군으로 잡아갔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서울 정릉 집 다락방에서 90여일 동안 숨어 지냈다. 그때 200여개의 만화 캐릭터를 구상했는데 그중 하나가 고바우다.”
-왜 고바우라고 이름을 지었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단단한 민족성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고바우로 했다. 고바우의 나이를 50대 중년으로 잡은 것은 당시 성인을 위한 만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이든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면 아이 어른 모두 다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바우는 머리카락도 한 올이고 표정도 없는 것으로 그렸는데.
“희로애락을 얼굴에 잘 나타내는 일본 만화와 차이를 주기 위해 고바우의 표정을 없앴다. 표정 대신 머리카락 한 올로 표현했는데 보통 때는 앞으로 구부러져 있다가 놀랐을 때나 화가 날 때는 똑바로 서고, 질릴거나 어이가 없을 때는 구불구불해지고 뭐 이렇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직사각형 얼굴에 각진 코, 작은 안경, 콧수염에 중절모를 쓰고 등장했지만 나중에는 얼굴 형태는 훨씬 둥글어지고 코도 더 크게 그렸다.”
-언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지.
“거짓말 안 하고 태어나서부터였다(웃음). 아기 때 바닥에 기면서 이런저런 낙서를 했는데 부모님들이 놀라셨다고 한다. ‘그림 신동’이 태어났다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도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우리 현대사와 함께한 고바우를 그리면서 고초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고바우가 늘 권력의 반대편에서 감시와 비판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했던 독재정권에서 고바우 영감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그림을 그려도, 바람을 그려도, 동물을 그려도 문제를 삼고 신문에 넣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 1979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언론사를 사전 검열할 때는 고바우 영감을 하루에 4편까지 그린 적도 많았다.”
고바우 영감은 세태를 풍자하는 시사만화로 자리매김하면서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고바우의 네 컷 만화는 우리 국민의 애환을 대변했다. 그림 속 머리카락 한 올로도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양아들 행세를 하고 다녔던 ‘가짜 이강석 사건’을 빗댄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 ‘경무대 똥지게 사건’(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서울시경분실에 불려갔고 허위보도로 벌금까지 냄), 인혁당 사건을 풍자한 같은 신문 1965년 1월 21일자 ‘녹아 없어진 눈사람’(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문초당하고 조서까지 씀), 박정희 정권의 연장을 빗댄 1966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색안경 너무 닮았네’(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람을 보내 경고) 등 무수히 많은 필화도 겪었다.
-민주화 이후 정치인의 요구 사항이 많았을 텐데.
“나는 원래 정치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선거철이 되면 앞 다퉈 식사를 하자고 했다. 대체로 얼굴 좀 험악하게 그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YS는 이중적인 성격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었고 DJ는 똑똑하고 달변가였다. JP는 그림을 좋아하고 털털한 사람이었다.”
-외국에서도 고바우가 인기였다고 들었는데.
“고바우 영감을 주제로 미국 하버드대와 일본 세이카대에서 두 명의 박사가 나왔다. 이 정도면 ‘박사 메이커’로 불려도 되지 않겠는가. 허∼허.”
미국 노스이스턴대학의 파울 그레즈 교수는 1977년 ‘고바우의 언어’라는 논문으로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6년에는 일본 세이카대 정인경 강사가 ‘고바우 작가 연구’로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십장생도에 고바우 영감을 담는 ‘고바우 장생도’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기부도 여력이 닿으면 계속할 생각이다.”
고바우를 주인공으로 한 특별전은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고바우가 바라본 우리 현대사’를 타이틀로 지난달 7일 개막한 이 전시에서는 ‘언덕길가’ ‘떡집은’ 등 김 화백이 2000년 이후 고바우 영감 연재를 종료하면서 그리기 시작한 풍속화를 비롯해 고바우 영감 원화 200여점과 고바우 영감 기념우표 등을 볼 수 있다. 역사박물관이 주관하고 있는 이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성남=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 김성환은 누구
1932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환 화백은 선배들을 제치고 서울 경복고등학교 미술부장을 맡을 정도로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한국전쟁 때 ‘고바우 영감’을 구상한 그는 1950년 11월 초 서울에서 창간된 주간 ‘만화신보’에 처음으로 고바우를 등장시켰다. 이후 ‘만화신문’과 ‘육군화보’ 등을 거쳤고 1955년 2월 1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고바우를 일간지에 처음 게재하며 한국 시사만화의 새 장을 열었다. 조선일보에 이어 문화일보 2000년 9월 29일자를 끝으로 고바우를 무려 45년간 1만4139회 연재한 한국 최장수 시사만화가이기도 하다. 이 기록은 2001년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고바우 영감 원화는 2013년 2월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1932년 개성 출생 △경복고 졸업·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수료 △연합신문 전속작가 △동아일보 연재만화 담당 △현대만화가협회장 △동아일보 국장대우 편집위원 △조선일보 이사대우 편집위원 △문화일보 상무이사대우 △한국만화가협회 고문(현)
[인人터뷰] “여유있는 분들이 자극받아 기부문화 확산됐으면”
입력 2014-11-26 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