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명의 돈, 실소유주 아버지가 인출한 경우… 법원 “은행 책임 없다” 판결

입력 2014-11-24 02:12
이모씨는 1997년부터 A은행에 아들과 손자 명의로 예금계좌를 개설했다. 주민등록 사본 등을 제시해 계좌를 만들었고 자유롭게 입출금 거래를 했다. 은행 직원들도 이씨가 계좌 명의자의 부친이고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계좌 비밀번호와 도장도 이씨가 관리했다.

이씨는 2009∼2011년 아들 명의 계좌 8개에서 1억5500만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씨 아들이 돌연 은행 상대로 소송을 냈다. 명의자는 자신인데 은행이 허락 없이 부친에게 돈을 인출해줬다는 것이다. 은행 측은 “해당 계좌의 실소유주는 돈을 입금한 이씨”라고 맞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2부(부장판사 홍이표)는 이씨 아들이 낸 예금채권 반환소송에서 “은행이 예금을 반환할 이유가 없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23일 밝혔다. 재판부는 예금이 이씨 아들 소유인 것은 인정했다. 다만 이씨 또한 예금 인출 권한이 있는 ‘준점유자’라고 봤다. 이씨가 오랜 기간 아들 명의 계좌를 이용했고,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인출한 점을 고려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씨 아들 외에 다른 가족은 거래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안이 29일부터 시행되면 이씨처럼 자녀 명의 계좌를 개설해 금융거래를 하기가 까다로워진다. 세금포탈 등을 목적으로 차명거래를 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이씨처럼 자녀 명의 계좌를 개설해 증여세 감면 범위인 5000만원을 넘기면 처벌 대상이 된다. 은행 세금우대 상품의 한도 제한을 피하려고 가족 명의 계좌에 자금을 분산하는 행위도 불법이다. 동창회 같은 친목모임 회장을 맡으며 차명으로 회비를 운용하는 ‘선의의 거래’는 허용된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