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남매를 전쟁고아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어릴 때 전북 순창군 순창애육원 마당에서 돌멩이로 공기놀이를 하고 근처 냇가에서 물놀이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고아원 언니 오빠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주는 빵을 먹으며 자랐지요.”
한국장로교복지재단 비전교실지역아동센터장인 박진숙(53·여) 목사는 최근 서울 관악구 센터 사무실에서 ‘컴패숀 시설 앨범’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컴패숀은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의 옛 표기다. 1966년 발행된 이 앨범에는 박 목사의 아버지 고 박석은 전 순창애육원 원장과 원생 72명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컴패숀 넘버 74’로 지정돼 해외 컴패션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은 순창애육원은 6·25전쟁 후 급속히 늘어난 고아를 돌보기 위해 52년 박 목사의 할아버지인 고 박삼수 순창읍교회 장로가 세웠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고아들을 돌봤지만 밀려드는 전쟁고아를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박 장로는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집과 땅을 내놓았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말씀대로 실천한 할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이어받았다. 이들은 오이와 고추 농사를 지으며 가족과 애육원생 등 100여명의 생계를 꾸려갔다.
박 목사를 비롯한 6남매에겐 유년시절 부모와 같이 여행을 가거나 가족끼리 오붓하게 지낸 기억이 거의 없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보다 애육원생들의 건강과 진학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애육원에서 쓰다 망가진 물건은 집에 가져오고, 선물로 들어온 새 물건은 애육원으로 가져가곤 했다. 박 목사는 “자녀들의 진학이나 결혼은 아버지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며 “우리 남매는 지금도 ‘아버지는 80명의 고아를 키우고 우리를 고아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반농담조로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6남매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부모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나눔과 신앙은 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매들은 모두 지역아동센터, 경로원, 장애아 특수학교 등 사회 곳곳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를 도와 애육원 보모로 4년간 일했던 박 목사는 혼자 힘으로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 사회복지학, 목회상담학을 공부했다. 89년부터 목포, 울산, 전주, 경기도 등지에서 목회를 하다 2009년부터 지역의 어린이와 청소년 39명을 돌보는 비전교실지역아동센터장을 맡았다.
이곳 아이들은 한부모 가정이거나 기초생활수급자·장애인 부모를 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아이들의 방과후 생활을 돌보다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간식부터 공부, 문화활동, 예방접종까지 지역아동센터에서 무료로 이용하면서도 감사할 줄을 몰랐다. 박 목사는 불현듯 컴패션을 떠올렸다. 그는 “애육원 보모 시절 컴패션 후원금으로 애육원 아이들과 함께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본 기억이 있다”며 “비록 지금은 도움 받는 처지에 있지만 ‘나는 소중한 존재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어 컴패션 후원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박 목사의 소개로 한국컴패션 홈페이지에서 후원아동의 인적사항을 면밀히 살펴본 학생들은 아프리카 케냐의 게오프레이(12)를 후원아동으로 결정했다. 또래보다 유난히 체구가 작은 게오프레이가 마음에 걸린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스스로 만든 ‘게오프레이 저금통’에 매월 후원금을 내고 돌아가며 편지를 쓴다. 박 목사는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가르치지 않아서 아이들이 나눔의 가치를 몰랐던 것 같다”며 “매월 용돈을 아껴 후원금을 내면서 기부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보람차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3대에 걸쳐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예수 정신’을 꼽았다. 그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셨다”면서 “우리 가족은 사람들이 후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믿음으로 지금껏 사재를 털어 돌봤다”고 덤덤히 말했다.
박 목사의 자녀들은 현재 대학에서 신학과 아동상담을 전공하고 있다. 그의 가계에는 나눔 유전자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미션&피플] 한국장로교복지재단 비전교실지역아동센터장 박진숙 목사
입력 2014-11-24 02:12 수정 2014-11-24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