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2월 세 번째 금요일은 유난히 추웠다. 입시한파였다. 대입 학력고사를 목전에 둔 떠꺼머리들은 긴장에 움츠리고, 추위에 떨면서 고사장으로 들어섰다. 시험지가 책상 위로 올라오고 저마다 ‘암기 지식’을 뽑아내 답안지를 채웠다. 일렬로 줄을 서 커트라인 안에 들어가면 ‘고생 끝’이었다.
허무하게도 잠을 줄여가며 외운 지식들이 휘발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순식간에 안드로메다은하 어딘가로 날아갔다. 뇌에 드문드문 박힌 수많은 파편만 남긴 채. 사실 빨리 잊고 싶기도 했다. 고통스러웠던 고교 3년은 머릿속에 있는 그 지식들과 동일체였다. 대학에서 만난 현실과 학문은 그런 지식들로는 가늠하기 힘들기도 했다.
20년 넘게 잊고 지냈던 ‘시험의 기억’이 최근 곤란한 질문 하나와 논란 하나를 등에 업고 일상을 침범했다. 곤란한 질문의 발원지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었다.
“아빠, 시험은 왜 보는 거예요?” “너, 시험이 그렇게 싫으니?” “그게 아니라, 좀 있으면 수능이 있잖아요. 그걸로 대학을 간다던데, 그런 시험은 얼마나 어려울까 해서요. 왜 시험을 봐서 대학을 가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에 ‘왜’라는 의문부호를 붙이자 말문이 막혔다.
며칠 지나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변별력이 떨어지는 ‘물수능’이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1994년 도입된 수능은 미국 SAT(대학입학자격시험)를 모델로 한다. 시작은 창대했다. 논리력과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임을 내걸었다. 그런데 지금은 짧은 시간 안에 60만명이 넘는 수험생을 줄 세우는 ‘오지선답형 객관식 시험’으로 전락했다. 학력고사와 비교해 나아졌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사교육이라는 사생아를 낳았으니 어쩌면 지은 죄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어느 단추부터 잘못 꿴 걸까.
시험의 사전적 의미는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수능이 부여받은 사회적 의미는 ‘권능’이다. 다가올 청년과 장년의 삶을 딱 하루에 결정지을 수 있는 무한한 능력 말이다.
대입 시험의 기본 목적은 인재를 선별하는 데 있다. 엄선한 인재를 대학에 공급하는 게 지상과제다. 대학은 근대 들어 국가경쟁력과 동의어가 됐다. 본래 학자들과 학생들이 만든 교육조합 형태로 출발했던 대학은 19세기 독일에서 연구 기능이 추가됐다. 20세기 이후에는 경제·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봉사 기능이 덧붙여졌다.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과학기술의 진보를 선도하고, 경제·산업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울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다.
전사들의 전투력은 가능성에서 나온다. 고작 12년 배운 지식으론 전쟁은커녕 전투에서조차 버텨낼 수 없다. 그래서 도입된 지 200년이 넘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90년에 육박하는 미국 SAT는 ‘줄 세우기’보다 ‘잠재력’에 초점을 맞춘다. 무대에 설 자격만 갖췄다면 마음껏 놀아보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다.
바칼로레아는 응시자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합격할 정도로 인심 좋은 시험이다. 대학에 들어가 ‘미래’를 만들 수 있는지만 본다. 가르치고 키우는 것은 대학의 몫으로 남겨둔다. 우리처럼 대학을 일렬로 늘어세우고, 거기에 맞춰 아이들을 집어넣지 않는다. 도서관마다 자격시험, 입사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으로 가득하지도 않다.
또한 시험의 목적 안에는 앞 세대가 다음 세대에 건네는 ‘부탁’이 담겨 있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나간, 한 움큼이라도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제대로 부탁을 하려면 ‘붕어빵’을 만드는 입시 제도는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규격화된 ‘붕어빵’으로는 ‘갤럭시’를 만들 수 있어도 ‘아이폰’을 창조할 순 없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
[뉴스룸에서-김찬희] 시험의 목적
입력 2014-11-24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