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1843∼1897)은 지전(紙廛)에 고용돼 민화를 그리던 환쟁이에 불과했다. 천부적 재능을 세상은 알아봤고 화명은 고종 임금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구속이 싫다며 궁궐을 박차고 나왔던 기인이었다. 조선 3대 화가로 꼽히는 장승업이 말년을 보낸 곳이 서울 ‘성북동’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근대와 개발의 시대를 거치며 옛 집은 물론 집터의 표지석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성북 지역을 미술사적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성북구립미술관이 개관 5주년을 기념해 내달 14일까지 여는 ‘성북, 예술의 길로’전이다. 조선 후기에서 근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며 300여년에 걸쳐 같은 공간을 호흡했던 예술가들이 초대됐다.
가장 이른 시기의 화가는 18세기 진경산수화가 정선(1676∼1759)이다. 이 지역에 살지 않았으나 성북계곡을 바라보며 그린 ‘동소문도’를 남겨 전시의 첫 장을 연다. 정선 사후 160여년 뒤 태어난 천재 화가 장승업이 말년에 세 들어 산 초가집의 집터는 화가 서세옥(85)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표석조차 버려져 미술관이 보관하고 있는 중이다.
일제강점기와 근대로 이어지면서도 족적을 남긴 여러 화가들이 이곳에서 살다 죽었다. 웅혼한 필치로 산천을 담았던 근대 전통화단 6대가 중 한 명인 변관식(1899∼1976)은 성신여대 부근에 ‘돈암산방’이라 불리는 한옥을 지어 살았다. 유출됐던 ‘세한도’를 일본에서 사들인 것으로 유명한 서화수장가이자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이 그린 ‘승설암도’의 승설암은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문인으로선 ‘문장강화’를 쓴 이태준(1904∼1956),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박태원(1910∼1986), 화가로는 월북화가 김용준(1904∼1967), 모더니스트 김환기(1913∼1974) 등이 나이를 잊고 교유했다. 김환기는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의 아내였던 김향안과 결혼해 신혼집을 구하던 중 김용준이 살았던 이곳의 ‘노시산방’을 물려받았다.
전시에는 이들 미술가들의 성북 지역 삶을 증거하는 작품 40여점이 선보인다. 정선의 ‘동소문도’ 속 성북 골짜기의 마을 풍경은 일제 때 도로가 나면서 제 모습을 잃었다. 손재형이 그린 승설암은 정겨운데, 오동나무가 있는 마당 밖으로 서재에 모인 예인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북동은 지금도 간송미술관의 봄·가을 전시가 문전성시를 이루며 문화의 아이콘이 된 동네다. 성북동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면면히 흐르는 문화적 과거와 만날 때 완결될 수 있다. 김보라 관장은 “승설암 등 옛 서화가들의 생존 당시를 증거하는 유산들은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존재할 뿐, 개발연대를 거치며 흔적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면서 “성북동을 예술가의 길로 복원하고 싶은 바람을 담아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집터 등 과거의 흔적은 도록과 영상으로 볼 수 있다(02-6925-5011).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미술사적 관점으로 성북 지역을 읽는다… ‘성북, 예술의 길로’전
입력 2014-11-24 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