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년 前 작품이 한국의 현실과 똑같아 슬퍼”

입력 2014-11-24 02:18
연극 ‘사회의 기둥들‘의 연출가 김광보가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무대 세트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연출가 김광보(50). 연극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꼽자면 이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로 데뷔 20주년인데, 지금까지 여든두 작품을 했고, 올해만 네 작품을 올린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연극 ‘사회의 기둥들’ 둘째 날 공연을 앞둔 그를 만났다. “첫 공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라며 소년같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공연을 연출했지만 관객석에 앉아 첫 공연을 볼 땐 여전히 두근거려요. 첫 공연을 올리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까지 내 역량을 다 쏟아내 버리기 때문에 첫 공연이 끝나면 케이오가 되죠. 다행히 온라인에서나 지인들이나 공연 잘 봤다는 얘기를 해줘 힘이 나요.”

30일까지 공연되는 ‘사회의 기둥들’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1828∼1906)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인형의 집’ ‘유령’ 등 입센의 여러 작품이 국내에서 수차례 공연됐지만, ‘사회의 기둥들’은 이번이 초연이다. 원작을 거의 손대지 않고 대사만 다듬어 120분간 쉬는 시간 없이 이어간다.

작품은 137년 전에 쓰여 진 것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현재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주인공은 노르웨이의 소도시에서 지역 영사로, 조선소 운영자로 살고 있는 카르스텐 베르니크. 그는 존경을 받고 입지를 굳혀 원하는 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가면을 쓴다.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본얼굴은 어떨까. 해고를 운운하며 노동자를 협박하고, 돈을 벌기 위해 제대로 수리되지 않은 배를 띄우라고 명령한다. 자신의 치부를 동생에게 덮어씌우기도 한다. 고귀한 척 순결한 척 지역사회를 위하는 척 살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침몰을 앞둔 자신의 배에 탔다는 사실을 알고선 무릎을 꺾고 쓰러진다.

김광보는 “올해 3월 번역이 끝난 대본을 받았는데, 4월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며 “민감한 소재가 됐기 때문에 모두 걱정했고 저도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작품을 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137년 전 이야기가 2014년 대한민국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 슬프죠. 역사는 순환하고 있겠지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위선적이고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게 됐어요.”

작품 속 세트가 눈에 띈다. 좌우가 평평한 무대 위에서 시작된 연극은 막이 바뀔 때마다 왼쪽으로 조금씩 기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무대는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상태가 된다. 그런데 배우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조금씩 침몰해 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 그런데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겹쳐진다.

김광보는 “사회의 정황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이든 오케이”라며 “그게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장르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내년엔 오페라나 가무극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

“10주년, 20주년이 제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허덕이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20년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예전엔 대본을 통째로 다 외워 연습 중 배우가 버벅거리면 제가 대신 (대사를) 쳐주기도 했었는데…. 요즘엔 그게 조금 어려워지긴 했어요.(웃음)”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