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김일성이 누구인데요?

입력 2014-11-22 02:30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 대역이 필요했다. 무명 연극배우가 캐스팅돼 말투와 표정 등을 똑같이 연습했다. 공안기관의 감시 하에 혹독한 연기훈련을 받았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을 때 거의 완벽할 만큼 김일성과 닮은 모습이 됐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갑자기 경색되면서 정상회담도 무산되고 말았다. 김일성 대역의 무명배우는 허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진짜 김일성인 양 평생 동안 환상 속에서 살게 된다. 아들에게 ‘짝퉁 수령동지’ 노릇을 하면서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개봉된 영화 ‘나의 독재자’ 줄거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흥미로운 스토리로 제작 단계서부터 관심을 모았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 설경구와 박해일이 호흡을 맞추었다. 탄탄한 시나리오에 스타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으니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된 듯 보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 반대였다. 개봉 첫날 외화 ‘나를 찾아줘’에 밀려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한 뒤 이틀 후에는 한국영화 ‘우리는 형제입니다’에 2위 자리마저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개봉 1주일 만에 5위로 떨어졌다.

개봉 2주일째인 지난 13일에는 1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20일 현재까지 관객 스코어는 38만명으로 기대에 비해 초라한 성적이다. 후반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결점은 있지만 이해준 감독의 연출솜씨가 비교적 호평을 받았고,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배급을 맡은 점을 감안하면 흥행 참패인 셈이다. 대박은커녕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젊은 관객들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한 영화사 대표는 ‘나의 독재자’ 개봉 전에 한 가지 우려를 표명했다. “영화 흥행을 주도하는 10대와 20대 젊은층에서 김일성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영화 홍보 홈페이지 등에는 “김일성이 누구지?” “그래서 김일성이 어쨌다는 거야?” “김일성이 그러든지 말든지 우리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김정은도 아니고 김일성은 너무 옛날 사람 아냐?”라는 댓글이 잇따랐다.

영화는 개봉 초기 젊은층이 이끌어주고 입소문이 확산되면서 30, 40대가 관람 행렬에 나서고 50, 60대까지 가세해야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 젊은 관객이 처음부터 아예 관심이 없으면 탄력이 붙지 않는다. 그러면 막을 내리는 극장이 늘어날 수밖에. 1970년대의 굴곡 많은 역사를 다룬 내용으로 중장년 관객을 겨냥했다 하더라도 상영하는 곳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젊은 관객이 영화 흥행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누구인데요?”라고 묻는 젊은층의 반응을 어떻게 봐야 할지 당혹스럽다. 김일성을 잘 모른다는 얘기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과 6·25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얘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현실인식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김일성으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의 얘기다. 아버지는 독재자 같은 기성세대를, 아들은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려는 요즘 세대를 상징한다. 영화 한 편 가지고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다만 김일성을 잘 모르는 세태에 영화가 외면 받은 현실이 안타깝다. ‘나의 독재자’는 현재 전국 5개관에서 상영 중이다.

이광형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