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했고 사람들은 장밋빛 환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발전이 무한히 가능하다고 외쳐댔고, 미래는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하나님은 풍요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하나님이고 오늘의 고통을 참으면 내일은 축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그날은 축복의 날이 아니고 심판의 날이라고 외칩니다. 야훼 하나님은 탐욕에 대해 분노하는 신이라고 합니다.
세계가 한 생활권 안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지구 어느 한 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몇 분 후면 전 세계에 알려집니다. 각 나라가 장벽과 울타리를 트고 하나가 되자고 하며 이를 ‘지구촌’이라는 개념 아래 담으려고 합니다. 말은 좋지만 참다운 ‘지구촌’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정신이 함께 자라야 합니다. 잘사는 나라의 기업과 개인은 욕심을 버리고 진정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형제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저술한 독일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1960년대 말 미얀마에서 1년간 살았습니다. 그는 미얀마 사람들의 생활이 서양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도 풍요롭게 사는 미얀마 사람들을 보고 경제지표보다 사람이 중요한 세계를 책으로 썼습니다. 국내총생산(GDP)에는 4대강 공사처럼 강산을 훼손시키는 일에 지출된 돈도 그 수치에 잡힙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무기를 만들고 쌓아 놓는 것도, 인간이 만든 오염을 제거하는 비용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GDP의 수치는 인간의 행복과는 무관합니다.
1972년 로마 클럽은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차 오일쇼크가 왔습니다. 성장이란 지구의 자원을 소비하며 일어나는데 자원이 유한한 상황에서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요.
유럽의 근대 자본주의는 성장·확장의 문명을 450년간 지속해 왔습니다. 이들이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데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식민지를 넓혔기 때문에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렇듯 자본주의 근대문명은 학살과 강탈의 역사입니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15%는 혜택을 입었지만 나머지는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장시대는 제도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모독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성장은 자원을 소비해야 하는데, 그만큼 어딘가를 계속 발굴하고 파헤치고 개발해야만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는 동안 지구는 병들고 인간도 덩달아 삶의 터전을 잃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정치인들이 성장주의를 목표로 삼습니다. 기업은 경제성장을 목표로 할 수 있지만 국가의 목표가 왜 성장이어야 할까요. 정부의 목표는 국민의 생명 안전 복지여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이제 웬만큼 성장을 이루었다면 지금부터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정당이라면 진정한 미래를 직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지구의 환경은 이 세기가 끝나기 전 인류가 멸절할 수 있을 만큼 나빠지고 있습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함께 살아가야 할 터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상생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김경호 목사(들꽃향린교회)
[특별기고] 국가는 생명·안전·복지 책임져야
입력 2014-11-22 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