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금융회사의 사외이사와 이사회를 향해 칼을 빼들었다. KB금융 내분 등 금융권의 진흙탕싸움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사외이사들이 사퇴를 거부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지배구조 손보기에 나섰다. 교수 중심으로 구성된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은행과 은행지주회사 사외이사는 임기가 절반으로 축소된다. 지배구조 연차보고서를 통해 사외이사 임명 사유와 이사회 운영 내역을 투명하게 공시하도록 의무가 강화된다.
그러나 이번 모범규준은 정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을 사실상 재탕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KB사태 조기 수습에 실패한 책임론을 무마하려는 당국의 뒷북 정책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금융 당국, 사외이사 정조준=정부는 20일 신제윤 금융위원장 주재로 금융발전심의회 정책·글로벌분과 확대연석회의를 열고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발표했다. 입법예고를 거쳐 다음달 10일부터 551개 금융사 가운데 자산 2조원 이상 금융회사 118개사에 적용된다. 신 위원장은 “일부 사외이사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면서 권한만 있고, 때로는 책임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며 “사외이사들이 특정 전문직이나 직업군에 과도하게 쏠리면서 자기 권력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신 위원장의 발언에는 최근 KB금융 사외이사들이 사퇴를 거부하는 등 금융 당국과 대립각을 세운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읽힌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KB금융 사외이사 9명의 1인당 연봉은 9200만원으로 국내 금융사 중 가장 높다. 내년 초 임기가 만료되는 사외이사는 모두 6명인데 이 가운데 4명은 실무 경험이 없는 현직 교수다. KB금융만 교수 출신 사외이사 비율이 높은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말 기준 4대 금융지주(신한·KB·하나·舊 우리)의 사외이사 32명 가운데 교수 출신은 16명으로 절반에 달했다. 지난해 3월 34명 중 9명(26.5%)이었던 것에 비하면 배 가까이 늘었다. 이 때문에 금융위는 사외이사 자격요건에 금융·회계·재무 분야 등의 실무 경험과 전문성을 최우선으로 제시했다. 교수나 공무원 출신을 줄이겠다는 의도다.
사외이사 임기를 제한하고 평가를 강화하는 방안도 시행한다. 은행과 은행지주회사의 사외이사는 임기를 현행 2년에서 1년으로 축소하고 매년 자체 평가를 실시토록 했다. 사외이사들은 대부분 연임을 통해 5년 임기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이를 평가 내실화로 검증하고 재신임과 연계하겠다는 게 당국의 생각이다. 당국이 압박 수위를 높이자 이경재 KB금융 이사회 의장은 이날 사의를 표명했다.
◇1년5개월간 지지부진한 지배구조 개선, 관치 논란 부담=하지만 모범규준은 지난해 6월 금융위가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에 살을 약간 붙인 수준이다. 당시 금융위는 “최고경영자(CEO) 공백 장기화, 경영진과 사외이사의 불필요한 논란 등 지배구조 리스크가 금융 시스템의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제기되고 있다”면서 “사외이사 제도가 경영진 견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외이사 그룹의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사회 운영 내역과 사외이사 선임 절차, CEO 경영승계 프로그램 등을 담은 지배구조 연차보고서는 선진화 방안에도 담겼다. 다만 연차보고서를 정기 주주총회 30일 전 공시해 주주의 알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위험 관리와 이해상충 행위 감독 등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CEO 승계 원칙을 수립하는 방안도 선진화 방안과 같다. 이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당국의 대책이 실효성이 없었다는 의미다. 당시 보완 과제로 제시됐던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지침은 아직 논의 중이다. 정부는 2012년 제출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대한 법률’이 국회에 계류돼 있어 추진력이 떨어진다고 설명하지만 잇따라 터진 금융 사고로 당국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지배구조 논의를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금융 당국의 이번 모범규준이 금융회사의 독립성을 해쳐 ‘관치 논란’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사외이사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한 부분은 이날 오전 연석회의에서도 논란이 분분해 최종안으로 보기 어렵다. 김용범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임기를 축소하는 것보다 단임제 운영이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있고 입법예고 이후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최종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사외이사 추천 시 금융·회계·재무 분야에서의 실무 경험을 내세우면서 ‘모피아’(옛 재무부+마피아)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직군 다양화보다 사외이사들의 책임을 높이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사외이사 논란의 핵심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 최대주주 참가를 배제하거나 추천 세력의 범위를 넓혀 자가증식을 막는 것”이라며 “사외이사의 직군 다양화나 임기 축소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wide&deep] “제2 KB사태 막아라” 사외이사 대수술
입력 2014-11-21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