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비하르라는 마을에 사는 32세 어머니가 아픈 아이를 업고 뙤약볕 속에서 13㎞를 걸어 보건소까지 간다. 의사는 아이가 돌림병인 칼라아자르에 걸렸다고 알려준다. 약값은 300루피. 돈이 없어서 약을 사지 못한 어머니는 아이를 다시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약초나 달여 먹이고 기도만 올릴 수밖에. 3개월 후 아이는 죽고 가족들은 시체를 화장한다.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1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 ‘그날 밤, 소녀가 죽었다’는 열대지방 빈민지역 주민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옛날 얘기가 아니다. 이 휘황찬란한 생명과학의 시대에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는다. 50년 전에 비해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은 의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기후와 문화, 사회, 정치까지 다양한 요소들로 엮여 있다.
두 개의 거대한 열대 질환, 칼라아자르와 말라리아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칼라아자르를 일으키는 도노반 리슈만편모충은 눈썹 한 가닥만큼의 무게도 나가지 않는 작은 기생충으로 우리 몸을 집 삼아 살아가는 모든 기생충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다루기 힘든 놈이다. 말라리아는 너무나 유명한 열대지역의 대표 전염병으로 인류의 오랜 박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붙는다. 백신을 둘러싼 과학계 이야기다. 그것은 ‘과학의 사기’라고 할 만한 것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연구비를 받아내는 연구들은 연구실 안에만 있을 뿐이었고, 언론에 소개되는 많은 과학기술들은 현장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다. 열대지역 주민들은 서방세계의 믿음직한 지식의 총아, 생물공학 연구소들이 이뤄낸 의학 연구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열대의학이라는 분야는 열대 전염병과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다. 2008년 세상을 떠난 저자 로버트 데소비츠 박사는 이 분야의 손꼽히는 권위자다. 수십 년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 등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고 1950년대 기생충학의 황금기부터 최근의 열대의학 소외까지 모두 겪어왔다.
저자는 현미경으로 봐야 보이는 기생충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의 민낯을 보여준다. 사실 전염병이란 주제는 언제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근 에볼라 바이러스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에볼라가 아프리카를 넘어 미국과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백신 개발에 속도가 붙게 되었다. 저자는 전염병이 언제나 ‘소외’와 관련돼 있음을 보여준다.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국가나 사람들만이 치료제나 백신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난한 지역 사람들이 전염병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전염병은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한 번 박멸되었다고 해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공공의료 예산을 줄이고 난 뒤 말라리아가 다시 돌아왔으며, 한국에서는 북한에 말라리아가 유행하면서 다시 감염자가 생겨났다. 이것은 전염병에 대한 선진국 시민들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전염병 vs 인간… 열대의학의 빛과 그림자
입력 2014-11-21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