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기획] 高스펙 신입 vs 低스펙 상사

입력 2014-11-20 03:40
중국 명문대 법학과를 졸업한 채모(25·여)씨는 지난해 한 건설사에 입사했다. JP모건, 도이체방크 등 대형 외국계 은행으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지만 한국 회사를 택했다. 열정이 넘치는 그였지만 가까운 곳에 암초가 나타났다. 바로 직속 부장이다.

지난해 말 부장은 채씨에게 자회사 부당거래 관련 보고서를 작성토록 했다. 채씨가 공정거래법을 적용해 보고서를 만들자 부장은 다짜고짜 상법을 적용하라며 퇴짜를 놨다. 항의를 하자 부장은 “내가 여기서만 20년 근무했어. 해외대가 대수냐. 잘난 체하지 말라”고 몰아세웠다. 채씨는 그날 ‘해외대’ 소리를 20번 넘게 들어야 했다. 그는 “나중에 한 직장 동료로부터 부장이 지방대 졸업생이라는 얘기를 듣고서야 어느 정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취업전쟁이 직장 안에 새로운 갈등구조를 만들고 있다. ‘눈높이’를 낮춘 신입사원이 많아지면서 ‘고(高)스펙 신입’과 ‘저(低)스펙 고참’이 불협화음이 빚고 있다. 최근 수년간 ‘스펙’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입사원 대부분은 출중한 외국어 실력, 다양한 자격증, 석사 학위 등을 갖추고 있다. 반면 1980∼90년대에 중소·중견기업에 입사한 관리자급 이상 고참들은 현장 경험은 풍부하지만 ‘스펙’에서는 밀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통이 부족해지고, 사사건건 부딪친다.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충돌을 해소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현모(33)씨는 서울의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공인회계사로 지난해 한 자원회사에 들어갔다. 회계사 1명을 뽑는 데 지원자만 5명이었다. 입사 당시 현씨가 속한 팀에는 15년 전에 고졸 현장직으로 들어와 사무직으로 전환한 김모(50) 부장이 있었다. 연말 조직체계 개편작업 때 현씨는 결재 라인을 간소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대학시절 기업인사 전문 교수로부터 극찬을 들었을 정도였던 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네가 뭘 안다고 고쳤냐”라는 면박과 의견 묵살만 돌아왔다. 김 부장은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고치겠다”는 현씨의 제안에도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현씨는 “대학에서 배운 대로 제안을 했는데도 합리적 토론 없이 ‘내가 불편하다’며 거절한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지금은 부장 입맛에 맞춰 조용히 지낸다”고 했다.

갈등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청년(만 15∼29세) 실업률이 치솟고 있어서다. 1996년 4.6%였던 청년 실업률은 지난해까지 7%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올해 2월엔 10.9%로 외환위기 당시 수준에 근접했다.

전문가들은 소통문화 혁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대부분 기업 등 조직은 상명하복과 효율성을 특징으로 하는 관료제 문화를 갖고 있다. 관료제는 능력보다는 연차에 의해 직급이 결정되는 단점을 안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강력한 관료제적 위계 대신 ‘일시적 전문가 조직’을 강조했다. 사안마다 조직을 구성해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업무 영역은 태스크포스(TF)를 활용해 조직을 신축적으로 운영하면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하다”면서 “생활 영역은 조직 차원에서 상하급자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를 지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