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는 게 어렵다고 하지만 영화판은 원래부터 그랬다. 고생으로 치자면, 불안정성으로 말하자면,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자면, 이 동네는 가히 설화적이다. ‘번지점프를 하다’(2000년)를 만든 김대승 감독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온 다음 바로 연출부 생활을 10년이나 했으니 아무런 돈벌이를 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10년 동안 번 돈이 2000만원도 안 될 거다.(웃음)”
“집사람과 아기가 잠들면 나는 아파트 1층 화단으로 나가 담배를 반 갑씩 피우고는 올라갔다. 동료나 후배들이 데뷔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왜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가’라는 끝없는 좌절감과 억울함이 나를 더 못 나게 짓눌렀다.” 이건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년) 김경형 감독 얘기다.
그 힘든 판에서 버티고 버티며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영화를 한 편 만들게 되는 순간, 그게 데뷔의 순간이다. 한국 영화감독 17명의 육성이 담긴 ‘데뷔의 순간’은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첫 영화에 이르게 됐는지 들려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영화를 하겠다며 청춘을 바치지만 데뷔의 순간에 이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 멋진 성공담이다. 그러나 그 데뷔의 순간이 좌절과 번민, 실패 등으로 점철된, 길면 10년이 넘는 인고의 세월 뒤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처절한 실패담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감독들의 이야기를 데뷔하는 순간까지로 국한한다. 그것이 노리는 효과는 분명하다. 그들의 실패와 방황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지에 집중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영화감독 17명이 출연한 이 이야기를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청춘들에 대한 조언으로 탈바꿈시킨다.
“어쨌든 끝까지 버틴 결과, 감독이 됐다. 어설픈 데뷔이긴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아직도 데뷔하지 못했을 것 같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년)로 데뷔한 민규동 감독의 이 얘기는 그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 책에 글을 쓴 감독들, 박찬욱이나 봉준호, 이준익 같은 이들까지 예외 없이 모두 다 “버텼다”고 고백한다. ‘버티기 고수들이 말하는 버티는 삶에 대하여’ 정도가 이 책의 부제로 적절해 보일 정도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방은진은 “심지어 차비가 없어서 밖에 나갈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정말로 가난했다. 그래도 선택한 이 길을 어떻게든 가야 이곳이 내가 원하는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 악착같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다보면 그들은 영화가 아니라 청춘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청춘은 한 마디로 버티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지나온 청춘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자부심은 ‘잘 버텼다!’ 이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버텨냈을까? 이게 이 책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진짜 이 길이 내 길인가’하는 불확실성과 마주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할 줄 아는 다른 게 없으니 ‘선택의 여지’니 그런 게 없었다.”
변영주 감독은 버렸다고 한다. “목표한 것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욕망이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지? 왜 계속 갖고 있으려고 하지? 그러면서 왜 목표를 이루기 힘들다며 좌절하고 서러워하는 걸까. 어떤 결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내 경우에는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욕망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자는 거였다.”
감독들의 데뷔기는 각각 다르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몇 가지 지점에서 만난다. 그들 중 누구도 재능이나 운명, 천직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뭐라도 일단 해보는 게 100배쯤 낫다고 말한다. 들이대는 것의 중요함, 방황하는 시간의 가치, 맹목에 가까운 낙천성, 퇴로를 끊는 과감함 등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자기 영화를 만들어낸 영화감독들이 숱한 실패 속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요즘의 청춘 담론과는 수준이 다르다. 용감하게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야성이 느껴지고, 두렵고 막막하던 시간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진실한 문장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답은 찾게 돼 있다. 먼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건 미련 없이 그 다음을 준비하는 태도다” “자꾸 겁먹고 퇴로를 확보해놓으려고 기웃거리지 말아야 한다” 등이 그렇다. 안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시대, 다들 쪼그라들어 전전긍긍하는 시대, 이런 목소리를 만나는 게 무엇보다 반갑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이들도 겪었네, 두렵고 막막하던 풋내기 시절
입력 2014-11-21 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