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어느 날, 후배 최봉일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 선교사는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를 하다 감옥에 갔다 추방돼 방콕에 살면서 라오스와 미얀마 선교 및 탈북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이 목사님. 라오스 남욘 지역에 교회당이 필요하니 꼭 하나 지어주시면 좋겠어요.”
현장을 확인하고 돕고자 방콕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라오스에서도 선교하다 발각돼 감옥에 갔다 왔다며 나 혼자 들어가 지원을 해주고 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라오스 남욘교회에 혼자 가서 현지 목회자를 만났고 건축 예정지에서 기도한 후 1만불을 건축비로 주었다. 6개월 후 성전이 완공돼 다시 이곳을 찾았다. 난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6개월 전 이곳 벌판에 서서 생캉 전도사님과 함께 성전을 세워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주셨습니다.”
500여명이 사는 마을에서 200여명이 봉헌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며 선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몇 번 이곳을 다니면서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을 최 선교사에게 밝혔다.
“4200㎞인 메콩강은 인도차이나의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을 흘러갑니다. 불교권이고 태국 외엔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제가 신학대학 교수 10년, 미국 이민목회 30년 하면서 항상 선교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메콩강 유역이야말로 선교의 땅 끝입니다. 나 같으면 방콕에 있지 않고 3개국 국경이 인접한 치앙라이에 와 살면서 선교하겠습니다.”
나의 이 말에 최 선교사는 대뜸 “목사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 방콕에서 치앙라이로 이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렇다면 선교를 나와 함께 합시다. 치앙라이에 선교센터를 짓고 교회 지도자들을 이곳에 불러 신학과 성경을 가지고 교육과 훈련을 시킨 다음 자기 나라에 돌려보내도록 합시다.”
우리는 선교회 이름을 메콩강선교회라고 지었고 2층 규모의 비전센터를 치앙라이에 건축했다. 본부건물과 2층 기숙사, 교회당 등 3개동의 건물이 세워졌고, 길과 배수로 공사까지 모두 마치도록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옆에 치앙라이 라차팟국립대학과 큰 호수가 있고 500m 거리에 온천까지 있어 휴양지로 으뜸가는 곳에 센터가 세워진 것이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 국경과 가깝고 치앙라이 국제공항과도 10분 거리로 최적의 위치였다.
이곳에서 매년 2월과 7월에 라오스, 미얀마, 태국에 있는 교회 지도자 재훈련과 함께 대학생들에게 공부할 방을 제공해 주면서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군대생활도 최전방에서 하는 이가 있고 후방에서 하는 사람이 있듯 어디서 선교해도 선교는 선교다. 하지만 미전도 종족을 찾아가는 선교가 바울의 선교정신이며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선교임을 확신하기에 열심히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메콩강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조기 은퇴를 결심한 나는 후임(김종수 목사)을 정한 뒤 은퇴식 후 그 다음날 17년 살았던 샌프란시스코를 훌쩍 떠났다. 원로목사가 되었고 지금 메콩강선교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신학대학 사무처장을 지낸 조남진 장로가 선교회 총무로 수고하고 있다. 최봉일 선교사는 안타깝게도 지난해 12월 지병으로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선교센터는 부인인 오갑순 선교사가 상주하여 선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믿고 있는 크리스천에게는 예배가 축복이고, 예수의 제자 되는 것(교육)이 축복이며 선교가 축복이다. 로마가 제국이 된 것과 19세기에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 20세기 미국이 세계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모두 선교 때문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 시대이고 우리 한국이 21세기에 세계의 주인공 되는 길도 선교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메콩강선교회의 역할과 책임은 참으로 막중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용원 (12) “4200㎞ 메콩강 유역은 선교의 땅 끝입니다”
입력 2014-11-20 0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