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신국원] 기억과 망각

입력 2014-11-19 02:02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실수로 살해한 주인공이 기억을 억누르다 정신병을 앓는 사연을 다룬 TV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런 드라마가 늘 그렇듯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현실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들 위로가 필요한 시점인지라 드라마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삶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아픈 기억들이 많습니다. 또 잊어버려서는 결코 안 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세월호 수색작업은 209일 만에 9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끝났습니다. 서울광장에 세워진 분향소도 청사 내 추모공간으로 옮겨진답니다. ‘일상 속의 추모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시내 도처에 시민들이 내건 노란색 현수막도 점차 비바람에 찢기고 색이 바래 갑니다.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망각과 싸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도 언젠가는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잊혀질 수밖에 없겠지만 왠지 가슴이 아립니다.

갓난아기 중에는 눈만 감으면 보기 싫은 것이 없어진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심리적 ‘까꿍 놀이’ 비슷합니다. 눈을 가리는 대신 자기 눈을 감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기억을 은폐하는 것은 정신병을 유발합니다. 이미 우리는 안전 불감증이라는 신경증적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실제로 반년 넘게 온 국민이 애도하는 중에도 안전사고가 줄을 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결코 잊으면 안 될 일을 애써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국가적 재난은 국민들의 마음을 결집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은 외국인들에게 경이로운 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몸부림은 국난을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극복하는 주요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부를 탓하기보다 국민이 발 벗고 나서 국난을 극복해낸, 국민적 역량을 보여준 예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엔 그런 발 빠른 대처와 재발방지 노력대신 책임 공방과 갈등이 더 컸던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지금도 바닷속에 잠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잊지 않도록 만듭니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도 같은 맥락입니다. 삶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추모비를 세우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다신 반복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표지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거나 망각하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후진국에서 한 번에 수백 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잊혀졌다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기억과 망각의 차이는 그토록 큽니다.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길은 망각이 아닙니다. 용서는 해도 잊지는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며 여론을 호도하고 끝내는 망각을 기다리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것은 잘못을 반복하게 만드는 방조이자 악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세월호 사건이 우리들 마음에 깊이 새겨져 다시는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빌어봅니다.

신국원 교수(총신대 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