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 조선

입력 2014-11-18 02:33
1896년 당시 제물포 주 도로의 모습.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는 기도와 함께 시작됐다. 아펜젤러와 아내 엘라 닷지는 한국 도착 4개월 전 결혼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최근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개관 6주년 기념으로 ‘아펜젤러의 친구들’이라는 기념전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펜젤러의 사진첩과 일기 등이 공개된 적이 있다. 아펜젤러 유족들이 1985년 배재학교에 기증한 사진첩 가운데 1895년 명성황후 장례 모습을 담은 사진이 최초로 공개되었던 것이다. 공개된 사진은 1895년 실제 장례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국장 여부로 논란이 되고 있음에도 근·현대사를 기록한 희귀 자료로 인정되어 언론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기도와 함께 시작된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2.6∼1902.6.11)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들어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다. 당초 일본 선교에 자원했으나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애커만(G E Ackerman)의 권유로 2개월의 고민 끝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한국 선교를 앞두고 1884년 12월 17일 약혼자 엘라 닷지(Ella Dodge Appenzeller)와 결혼한다. 길지 않은 18년의 결혼생활을 한국 선교에 쏟아 부었던 그들 부부의 사랑과 희생은 아펜젤러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미국에 있던 4남매는 아버지를 차가운 물속에 수장시킨 한국을 다시 섬기기 위해 왔다. 이들은 1920년 내한해 1940년까지 항일운동에 참여, 강제 추방당했다가 6·25전쟁 때 귀국, 고아들을 돌보는 등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1885년 4월 5일 일요일 오후 3시.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주님, 이 나라 백성들의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소서!”

아펜젤러의 기도는 실제로 그의 선교활동 가운데 이루어졌다. 한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서 1885년 배재학당을 설립해 교육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했다. 성서번역 언론 출판 활동을 주도해 관련 분야의 기초를 놓기도 했다. 그는 17년이라는 짧은 선교 활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하기 2년여 전, 중국과 일본 선교에 정통한 매클레이(R S Maclay)는 쇄국으로 닫혀 있던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오래전부터 기도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일까. 1882년 5월 22일 한국과 미국의 수교(조미수호통상조약)를 기념하고자 1883년 한국의 사절단(보빙사)을 미국에 파송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특이한 차림새는 당시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뉴욕타임스와 뉴욕헤럴드, 보스턴 지역의 일간지 등은 ‘한국 사절단(The Corean Embassy)’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방문 경로와 옷차림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미국의 해외선교부들은 오랫동안 문호가 닫혀 있던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던 터라 사절단이 미국 본토에 도착했다는 자체를 선교의 청신호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일본에 파송되었던 미국 성서공회 소속 목사 루미스(H Loomis)는 이들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절단이 가는 경로는 일본에 1개월간 체류하다 1883년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일본에 머무는 동안 루미스는 사절단 대표인 민영익을 만나 이들이 한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젊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절단에서 선교 가능성 보다

루미스는 사절단이 미국 본토에 이르기 전 미국 성서공회 본부 총무 길맨(E W Gilman) 목사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 사절단에게 미국 문명의 기독교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의 미래에 이들이 큰 영향력을 끼칠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한국 사절단으로 인해 미국 내 교회와 선교부가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 매클레이를 후원하고 있던 미국 감리교 소속 가우처(J F Goucher) 목사는 샌프란시스코를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한국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민영익(명성황후의 조카) 일행을 만난다.

가우처는 이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이 있음을 파악하고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 총회에 2000달러를 기부하면서 5000달러의 기금이 구성되었고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선교를 타진하도록 했다.

중국과 일본 선교 경력만 40년에 가까운 매클레이 선교사는 노련했다. 그는 1884년 6월 13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24일이 되던 날 제물포에 도착했고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선교 허락을 얻어낸다. 1884년 7월 4일자 윤치호 일기에는 “고종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미국상회의 근해 항해를 허가하고 미국인에게 병원 및 학교 설립을 허가하라”는 교지를 기록했다. 일반인에게는 기독교 선교 윤허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동북아 선교에 경험이 많은 매클레이와 미국의 해외선교부는 한국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약력=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Th.M.)과 동 대학원(Ph.D.)에서 공부하고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전임 연구원 및 연세대 강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명지대 객원교수와 교목으로 있다. 연구논문 및 저술로는 ‘조선후기 개신교 전래와 수용연구’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공동 번역)’ 등이 있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