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 또래의 죽음이란 도시괴담 같은 거였다. 존재하되 실체는 확인된 적 없는 무엇. 이웃 동네와 아파트, 길 건너 학교에서 익명의 누군가를 덮친 ‘사건’과 ‘사고’는 귓속말로 전해졌다. “그 얘기 들었어?” 귓불을 간질이던 흥분한 친구의 숨결. 죽음은 그런 은밀한 얘기였다.
20대에 동년배의 부고는 불운의 이야기로 들렸다. 임무 다한 인공위성 잔해가 떨어졌는데 우연히 내 머리 위였다는 식의 지독한 불운 말이다. ‘나는 절대 겪지 않을 남의 일’이란 뜻이었을 거다. 서른 줄을 넘기면서야 불행이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타인의 불운인 줄 알았던 노화가 닥쳤을 때였을 거다. 당연한 일이다. 삶이 언제까지나 구김 없이 탱탱할 수는 없다. 콜라겐과 레티놀, 히알루론산 같은 걸로 얼굴을 부풀려도 마찬가지다(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니 지구인이 중력과 시간 법칙을 거스르려면 블랙홀을 ‘살아서’ 통과해야 한다).
가수 신해철의 이른 죽음이 전해진 지난 3주. 그의 오래된 앨범들을 찾아 무한반복해 들었다.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리프라는 ‘그대에게’의 전주를 되돌려 듣고, 그가 추천한 ‘나의 명곡’을 한 곡씩 내려받아 플레이리스트에 보관했다. 그가 “천재란 이런 것”이라고 극찬한 프린스의 ‘1999’와 오마주로 들렸던 신해철의 ‘the Greatest Beginning’은 몇 번이나 왕복 청취했는지 모르겠다. 실로 뒤늦은 팬질이었다.
무한궤도에서 넥스트로 넘어갈 즈음 이미 난 신해철의 팬이 아니었다. 그가 진행한 라디오 ‘음악도시’나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으며 청춘을 보낸 세대도 아니다. 음악적 성취를 말할 처지는 더욱 아니고. 그래서 이제 와 발동한 팬심에 ‘한 시대의 종말’ 같은 수식어는 가당치 않다. 그보다 지금의 감정은 당혹감에 가까울 듯하다. ‘천재의 요절’ ‘노환으로 인한 별세’ 같은 관용구로 정리되지 않는 40대의 부음.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40대인 나는 아직 방법을 모르겠다.
신해철은 김광석이나 김현식이 아니다. 스물다섯 세상을 뜬 유재하는 더구나 아니다. 요절 천재들에게 재능이 고갈된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짐작건대 상황은 정반대였다. 그들의 영혼을 불안하게 만든 건 아마 넘치는 재능이었을 거다. 신해철에게는 양면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지적이고 도발적인 20대 뮤지션과 쇠락한 40대 아저씨.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신해철은 멋졌다. 하지만 그는 해야 할 말만큼이나 하지 않아도 좋을 말들을 많이 했다. 왕년의 청춘스타들이 그랬듯 올라간 만큼 내려갔다.
음악인 신해철에게 얼마 전 발표한 앨범 ‘리부트 마이셀프’는 “그래도 할 말이 남았다”는 항변이었다. 현실의 신해철은 몸집이 적당히 불어난 중년 남자였지만 그가 음악으로 꿈꾼 세상은 달랐다.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Here I Stand for You’)라던 1997년의 청년처럼 “애아범이 돼도 철이 들질 않아 전혀”(A.D.D.A) 라고 말하는 2014년의 신해철은 어느 평론가의 말마따나 ‘소년의 세계’에 머물렀고 음악으로 고집스럽게 그런 세계를 구현해냈다.
그의 고집 덕에 마음이 움직였다. 한때 신해철은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말을 하고 보일 필요 없는 모습도 보여줬지만, 그래서 안쓰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40대의 우리 모두 지내온 세월만큼 망가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버틴 시간이 꼭 나빴던 것도 아니다. 버텨야 ‘리부트 마이셀프’를 외칠 기회라도 잡을 테니.
잘 알던 사람, 친분이 있거나 좋아하던 또래의 40대 가장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떴다. 40대가 되면(50대 이후라면 더욱) 분명해지는 게 있다.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게 돼 있다. 그러므로 ‘왜’라는 건방진 질문은 삼키는 게 좋다. 확률과 우연의 세계에서 ‘언제 어떻게’조차 우리 일은 아닌 거다. 기회가 있고 용기가 남았을 때 한발 더 나가볼 뿐이다. 신해철이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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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이영미] 40대의 죽음 - 요절과 별세 사이
입력 2014-11-17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