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들른 광화문 서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11월 둘째 주 일요일. 도심에서 치러진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고궁의 가을풍경까지 완상한 뒤 서점으로 발길을 돌린 참이었다. 도서정가제 시행을 코앞에 두고 온라인 서점들이 막바지 폭탄세일에 열을 올리는 와중에 이렇듯 많은 이들이 서점을 찾아 책을 읽고 계산하는 풍경 앞에서 새삼 가슴이 시큰했다.
시대가 많이 변했어도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엿보인다. ‘팽팽한 평화’라고 이름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세상사에 호락호락 내 삶을 휘둘리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기 같은 것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과 눈길에서부터 감지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이런 표정을 부여해주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인생살이가 순탄할 때, 등 따시고 배부르고 콧노래 절로 나올 때 우리는 책을 찾지 않는다. 열심히 질주하다가 돌부리에 걸린 듯 ‘지금 내 인생이 제대로 가는 걸까’라는 의문이 찾아올 때, 술과 수다와 게임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가시 같은 것이 마음을 후빌 때, 나도 친구들도 조용히 책을 펼쳤다. 영화보다 예능보다 스포츠보다 훨씬 재미없는 책은,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 다가와 불편한 각성과 묵직한 위로를 건넸다.
‘용서라는 고통’을 읽는 동안 가슴 치며 통곡했다는 독후감에, ‘남자, 외롭다’를 읽고 난 후 코 골며 자는 남편 모습을 바라보다 밤을 새우고 말았다는 편지에, 정작 원고를 찾아내고 매만진 나는 섣불리 말을 보태지 못했다. 그 한 권의 책이 그들 삶 어딘가에 새겨냈을 문양의 세기와 형태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책을 만드는 동안 여러 번 교정펜을 놓고 심호흡했던 내 감성과 사유가 그들에게도 가닿았다는 점에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원고를 발굴하고 글을 다듬는다. 이 날렵한 시대에, 원고지 1000장짜리 사유의 특별한 쓰임새를 잘 알기에,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 쓰임이 절실한 때라고 믿기에.
지평님 대표
국민일보-문화체육관광부 공동기획
주관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책 권하는 CEO, 책 읽는 직장-출판사 한마디] 황소자리
입력 2014-11-17 0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