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해마다 봄이 오면 꽃보다 먼저 피는 것이 있었다. ‘아파트 꽃’이다. 대형 고급 아파트 숲이 들어서기를 십수 차례 이어가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보금자리를 옮겼다. 2014년 초겨울 옥수동엔 지금도 아파트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강 건너 강남에 살던 부자 이웃들이 찾아들고 달동네에서 살던 일부 사람들은 임대 아파트 품에 안겼다.
옥수동은 아직도 변신 중이다. 누구는 또 새로 들어오고 누구는 어디론가 떠난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던 달동네에서 꿈을 키웠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년 전 ‘서울의 달’이 뜬 동네
한석규(홍식) 최민식(춘섭) 채시라(영숙) 홍진희(꽃뱀 미선) 김원희(호순) 김용건(퇴물 제비) 김영배(초보 제비) 백윤식(미술선생) 윤미라(미술선생을 좋아하는 푼수 아줌마 역). 농업고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한 순진한 총각,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노처녀 경리사원, 이혼녀 카페주인….
1994년 1월부터 10개월 동안 MBC TV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에 나왔던 등장인물이다. 때로는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거짓말도 하고, 어떤 이는 사기를 친 뒤 죄책감에 시달리는 안방극장 속 인물들은 20년 전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은 서울의 달 드라마 촬영지가 됐을 만큼 서울에서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두 동네는 빈과 부의 양 극점을 상징했다.
서울의 달에서 서민들과 저소득층의 보금자리로 그려졌던 옥수동은 현재 재개발 사업으로 대부분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성동구 매봉산 바로 아래 13구역을 제외하고는 A아파트, B아파트, C타운, D아파트 등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지하철 3호선 금호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옥수중앙교회로 올라가는 길은 70, 80년대의 달동네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교회 앞 문방구와 전파사도 예전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다.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옥수동에서 보낸 배달앱 ‘배달의 민족’ 대표 김봉진(39)씨는 “재개발 전 옥수동은 싼 전·월세방이 많아 저소득층과 서민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도심 인큐베이터’ 구실을 해왔다”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3때까지 미술학원도 한 번 가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도 어김없는 수능 추위가 기승을 부린 13일 서울 성동구 금호동 옥수중앙교회를 찾았다. 교회로 가는 길은 갈수록 좁아졌다. 재개발을 반대해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변엔 30여 가구가 올망졸망 붙어서 예전의 골목길 정서 그대로였다.
택배차량 한 대가 시야를 가로막고 움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택배기사 박모(51)씨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A4 크기의 안내문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골목길은 일부 차량이 통행할 수 없습니다. 폭 2m, 높이 2m(특히 택배차량) 이상 차량은 주택 처마(물받이) 담장에 걸립니다. 통행하다 파손시킬 경우 이제까지 보수한 수비리 전액을 청구하겠습니다.’
교회로 올라가는 길에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세 명을 만났다. 한 아이는 음악학원에 간다고 했고 다른 아이는 미술학원으로 간다고 했다. 키가 작은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아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다물었다.
교회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호용한(57) 옥수중앙교회 목사는 “연극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란 제목처럼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한강과 압구정동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면서 “지금은 아파트 숲에 가려 한강도 잘 보이지 않지만 집값이 엄청나게 올라 서울 외곽으로 이사 간 사람들이 많다”고 밝혔다.
이웃 사랑과 지역 섬김, 옥수중앙교회
호 목사에 따르면 옥수중앙교회가 장학, 복지사역으로 돕고 있는 가정은 대략 500가구다. 옥수동, 금호동 지역 주민은 강남과 가까워 파출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거노인이나 조손가정 아이들도 적잖다. 노인 중에 상당수는 자녀들이 있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제외됐지만 자식들이 전혀 찾아오지 않아 방치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혼자 힘들게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은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기 어렵다. 혹시라도 고독사했을 경우 사후를 처리해 줄 사람이 없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호 목사는 2003년 ‘365일 사랑의 우유 나누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홀로 사는 노인에게 매일 우유를 넣어 주고 이틀 이상 우유가 쌓이면 배달원이 교회로 연락해 줘 안부를 챙기는 시스템이다. 교회는 10년 넘게 매일 아침 독거노인들의 가정에 우유로 안부를 챙겨왔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한 독지가가 매월 200만원을 후원한 돈으로 100가정부터 시작했다. 올해는 250가정에 우유 나눔을 하고 있다.
“교회는 ‘우유 안부’를 통해 고독사를 예방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독사를 당한 노인 가족들에게 연락해 장례를 치른 적도 있습니다. 이 운동이 허브가 돼 전국 곳곳 독거노인이나 불우 이웃들에게 매일 아침 안부를 묻는 신선한 우유가 배달됐으면 좋겠습니다.”
옥수중앙교회는 올해부터 우유사역과 함께 새로운 전도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교인들과 함께 이웃 불신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형편을 살펴보고 그들의 작은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다.
교회는 금호동과 옥수동 주민센터 복지 담당자의 도움을 받아 도움의 대상인 차상위계층 20가구의 주소와 명단을 받았다. 호 목사와 성도들은 2주에 한 번, 그리고 한 번에 10가구씩, 직접 가정을 방문해 가구당 5만원 상당의 생필품을 필요에 따라 바꾸어 가며 전달해 준다.
하반신 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이웃, 고시원 쪽방에서 혼자 외로이 살고 있는 반신마비 이웃,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사람, 신장 투석하는 가장에 뇌경변으로 고생하는 딸을 가진 가난한 가정, 허리 척추를 다쳐 하루 종일 누워있는 노모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는 50대 여성, 탈북해 남한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보살핀다.
임대 아파트에 살며 우유와 요구르트를 배달하는 이창심(54·옥수중앙교회) 집사는 3년 전 남편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나는 바람에 졸지에 가장이 됐다. 이 집사는 13일 수능시험을 본 막내아들을 위해 새벽기도와 예배에 참석한 뒤 호 목사 일행과 우유 배달에 나섰다.
먼저 금남시장 뒤편 후미진 주택가에서 보증금 180만원에 월 60만원을 내고 근근이 살아가는 김경미(46)씨 집을 찾았다. 신장 1m40도 안 돼 보이는 김씨는 역시 왜소증으로 키가 크지 않은 두 오빠와 다리 수술을 잘못 받아 전신 마비가 된 노모 윤모(75)씨의 대소변을 25년 동안 받아내는 힘겹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혼도 않고 혼자 힘들지 않느냐”는 이 집사의 말에 김씨가 “우리 엄마, 오빠와 함께 사는데 힘들다니요”라고 대답하자 이 집사의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A임대아파트 6층에 사는 신모(54)씨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뇌경변 증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22세 딸과 고3 아들,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한 달에 70만원 정도 국가 보조비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사진을 촬영해도 좋겠느냐”고 묻자 “사실, 나와 딸이 투병하고 있는 것을 친구들도 모르고 있다”면서 “신문에 나가면 안 되는데 걱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B임대아파트 2층에 거주하는 박모(52)씨 집을 방문할 땐 조심스러웠다. 척추병과 당뇨 합병증으로 맘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호 목사가 번호를 누르자 용케도 박씨가 침대에서 걸터앉아 불청객을 맞이했다. 박씨는 발이 괴사되고 있지만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의료 혜택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 사는 형편이 이렇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박씨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쌀’ 사역도 교회가 1년에 서너 번씩 실시하는 사역이다. 쌀 300∼400포대, 라면 300∼400박스를 구입해 이웃들과 함께 나눈다. 특별히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교회 절기와 명절 등을 전후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한다.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하는 옥수중앙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역할을 잘 제시하는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랑을 실천하며 섬김과 나눔을 통해 참된 교회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사명임을 보여준다.
옥수중앙교회는 18일 본교회당 1층 주차장에서 지역 주민을 위한 ‘사랑의 김장나누기 행사’를 연다. 국민일보와 옥수중앙교회가 주최하고 농협중앙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올해가 5번째다. 교회는 이날 몸이 불편하고 가정환경이 어려운 500가정을 찾아가 1500포기의 김치를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예정이다.
호 목사는 “한국교회는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며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면서 “세상과 사회로 눈을 돌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그 어르신 댁 우유가 이틀째 그대로 있어요”… 서울 옥수동에서 우유는 생명이다
입력 2014-11-15 02:45 수정 2014-11-15 2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