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을 계획하던 중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웨스턴복음주의신학교에 가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오라는 허락이 난 것이다. 나의 전력 때문에 신원조회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1979년 7월에 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한국에 남겨둔 채 유학길에 올랐다. 이곳에서 신학석사(M.Div) 과정을 1년 하고 귀국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사실 난 서울신학대학원에서 이 과정을 미친 상태였기에 대학교수를 하려면 박사학위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이왕 미국에 왔으니 목회학박사(D.Min) 과정을 하겠다고 학교에 간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를 한국에서는 미국에 눌러 살고 싶어 한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난 의지대로 풀러신학교 목회학박사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4개월간 대학원 학기를 끝내고 풀러신학교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중 경치가 좋다는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 2개월 후 학교 등록을 하기 때문에 시간 여유도 있어 이곳에 계신 선배 서정락 목사를 찾았다.
선배는 대뜸 “이 목사, 미국에서 목회할 생각 없어?”라고 물었다.
내가 풀러신학교 목회학박사 과정에 입학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자 지금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에 목사가 없어 어려움이 많다며 나를 대선배인 조명석 원로목사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조 목사님은 나를 보더니 “이 목사, 여기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에서 당분간만 설교해 주면 좋겠어요. 나도 설교할 수 없는 형편이고 잘못하면 교회가 없어질 것 같아요.”
사연이 있었다. H목사가 여기서 3년 목회하면서 교회가 많이 부흥되었는데 얼마 전 새너제이에 교회를 개척해 떠나는 바람에 많은 교인들이 따라가 교회가 어려워졌다고 했다. 노 선배가 눈물까지 보이시는데 신학교 입학까지는 2개월이 남아 있어 내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당분간만 설교한다고 시작한 것이 무려 13년을 목회하게 되었으니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맞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이곳에 눌려 앉히셨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유학 와 공부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하게 되면서 2년6개월 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었는데 아내가 남편 없이 3남매를 키우며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다른 면에서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셨다. 아내가 금요철야기도회와 금식기도를 하다 은혜 체험을 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방언 은사와 통변, 신유 은사를 받아 기도하면 난치병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치료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보람과 의미를 찾는 기회가 된 것은 고난도 유익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 믿는다.
난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를 맡으면서 이민교회를 신앙훈련만 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민족의 동질성을 함께 지켜나가는 ‘민족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시는 분, 버클리대학에 오시는 훌륭한 인사들을 모시고 강좌를 많이 열었다. 함석헌 홍종인 안병무 김동길 한완상 안병욱 등 이런 분들을 강단에 모셨다.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나 역시 목회에 안정을 얻었고 성도가 늘면서 교회가 여러 사역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자체 건물이 없어 미국교회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은 한인교회들이 이런 형태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걸핏하면 여러 문제를 제기하며 나가 달라고 했는데 세 번째 또 나가 달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진 사정을 해서 간신히 눌러앉곤 했는데 이젠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 나가라면 나갑시다.”
“목사님, 어디서 예배 드려요. 갈 데가 없는데….”
“날씨 좋잖아요. 야외예배 드립시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용원 (9) 美 유학길에 맡은 이민목회… ‘민족목회’로 승화
입력 2014-11-17 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