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보울비는 세계보건기구의 의뢰로 2차 세계대전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관한 연구보고를 하였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따뜻한 정서적 돌봄이 아동 발달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고아원에서 생리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는 제공되었지만 아이들은 지속적인 정서적 돌봄이 부족하여 머리를 흔들거나 우울증 같은 병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애정결핍으로 죽은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생리적 욕구와 함께 심리적으로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의식주와 환경이 열악하여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은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에미 워너는 50년 동안이나 하와이 카우아이섬의 불우한 아동들의 성장을 연구하였다. 1955년에 태어난 698명 중에서 201명은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중독을 앓는 부모, 심각한 가정불화 등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미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아이들 중 129명은 예상한 대로 문제아가 되었다. 학습과 행동장애를 보였고 범법자가 되거나 정신질환을 앓았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한 72명의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자라면서도 전혀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아주 모범적이었고 사회생활에도 잘 적응했다. 실업자와 생활보호대상자 그리고 범법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과 배려심 그리고 경제적 능력을 갖춘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도대체 무엇이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이 아이들을 행복하고 건강한 시민이 되게 했을까. 72명의 아이들은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돌봐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니카 슈만은 이렇게 말한다.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곁에 있어도 대부분 역경을 극복한다.” 꼭 어머니나 아버지,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필요는 없다. 먼 친척이나 선생님, 이웃이나 교우들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뢰젤의 연구에도 불우한 청소년 146명 중에 80명은 학교를 자퇴하고 마약과 폭력을 일삼았으나 66명은 역경을 극복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어른이 되었다. 이들 역시 사랑으로 돌봐준 사람이 곁에 있었다.
이처럼 역경을 극복하도록 곁에서 돌보는 사람을 윌리암 그래서는 ‘키-퍼슨(key-person)’이라고 했다. 나를 무조건 인정해주며 사랑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키-퍼슨을 적절한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토론들도 있었으나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내 인생의 열쇠와 같은 사람’ 같은 긴 문장이 되어 키-퍼슨이 외래어가 되었다.
이른 봄부터 진달래, 철쭉, 장미축제로 이어져 국화축제를 지나 이제 만추(晩秋)다. 국화가 장미축제에 주눅 들지 않고 가을철에 자기의 축제를 하듯 자연계에는 모두 자기들만의 절대가치를 자랑한다.
그저께 치른 수능시험으로 본격적인 입시철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 절대가치가 있는 꽃들이 아니고 성적이라는 비교가치로 줄을 서야 하는 서글픈 계절인 셈이다. 해마다 대입 실패로 자살했다는 비극적인 뉴스가 반복되고 있다.
‘대학에 낙방해서 자살했다’는 표현이 사실은 바르지 못하다. 대학에 낙방한다고 모두 자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대학에 불합격한 것일 뿐 절대가치가 있는 존재다. 나는 너를 무조건 사랑한다”고 붙잡아주는 키-퍼슨이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비극에서 우리의 참된 키-퍼슨이 되어 주신 것처럼 이제 우리가 수능이라는 비교가치의 비극 속에 줄 서 있는 우리 아이들의 키-퍼슨이기를 두 손 모은다.
김종환(서울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 명예교수)
[김종환 칼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입력 2014-11-15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