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컴퓨터가 앗아간 글자 표정… 그 시절엔 살아있네

입력 2014-11-14 02:30


글자에도 표정이 있다. 시각적으로 잘 디자인된 글자는 뜻 이전에 형태로 말한다. 따뜻함과 차가움, 강직함과 부드러움을 구별해주고, 안겨오고 생글거리는가 하면, 긴장시키기도 하고 선동하기도 한다. 운동성이나 활기, 현대성 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글자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하다. 글자에서 표정을 지워버린 주범은 컴퓨터다. 1980년대 후반 서체 디자인 분야에서 컴퓨터가 쓰이기 시작하면서 글자들은 표정을 잃고 지루해져 버렸다.

“컴퓨터가 나오자 레터링과 같은 아날로그 디자인은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런 세태가 글자 문화에도 영향을 준다. 메마른 디지털 활자가 대세가 되니까 정서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석금호 산돌커뮤니케이션 대표)

‘레터링(lettering)’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조형적인 규칙에 따라 도안한 글자, 손글씨처럼 일회적인 글자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똑같이 쓸 수 있는 작도의 규칙이 전제된 글씨를 말한다. 섬세한 표정을 가진 글자로 보면 되겠다.

‘한글 레터링 자료집 1950-1985’은 과거 한국에서 만개했던 레터링의 시대를 증언하는 책이다. 1950년부터 1985년까지 35년간 한국에서 나온 대표적인 레터링을 수집해 총 315점을 수록했다. 광고 문안, 정치 포스터, 영화나 음반 타이틀, 잡지 제호, 신문 코너명, 상점 이름, 상표 등이다.

이 책을 만든 프로파간다 출판사의 김광철 대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레터링이 일상다반사로 쓰이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글자 형태와 그 논리를 탐구하는 것이 오늘의 레터링 작업에 유용하리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라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1950년부터 1985년까지로 기간을 한정한 것은 그 35년에 우리나라 레터링이 겪은 생성-발전-부흥-퇴조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레터링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레터링이 급격히 사라졌다.

컴퓨터 글자의 시대가 그렇게 20여년 이어졌다. 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 디자이너들 사이에 ‘레터링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1990년대만 해도 디자이너들은 한글을 쓰길 주저했다. 멋이 없으니까. 그러나 한 4, 5년 전부터 김기조 등 젊은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과거 레터링의 전통을 현대화해서 표현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굉장히 활발해지고 있다”며 “단순한 복고는 아니고, 우리들만의 문화 속에서 미학적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