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빚은 누구의 책임일까

입력 2014-11-13 02:30

자동차를 굳이 현금 일시불로 사는 친구가 있다. 돈이 많아 그러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얼마 전 쏘나타를 샀는데, 더 좋은 차를 사볼까 며칠 고민하더니 결국 수중의 현금에 맞는 차를 택했다. 그 친구는 ‘빚지지 말자’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신용카드 할부도 빚을 지는 거라며 2000만원이 넘는 현금을 싸들고 차 사러 간 것이다. 그 좌우명 지키느라 몇 해 전 아파트를 팔고 전셋집에 산다. 내 집이 없지만 빚도 없다. 오히려 집주인에게 전세금 돌려받을 ‘채권자’가 됐다.

빚 권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

전에는 ‘독한 녀석’ 하고 말았는데 요즘 보면 이 친구가 무슨 ‘저항운동’이라도 하나 싶다. TV를 켜보자. 케이블·IPTV는 빚내라는 대출광고가 점령한 지 오래다. ‘무(먹는 무)만 아니면 누구나’ ‘전화 한 통화로 1분이면’ ‘단박에’ 빌려준다고 유혹한다. ‘남편 몰래, 친정 몰래’ 은밀히 빚내는 법까지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의 93%는 케이블·IPTV로 텔레비전을 본다. 이런 광고는 하루 400회 이상 그 전파를 타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대폭 완화했다. 보통 사람이 돈 빌릴 때 최대 걸림돌이던 규제를 풀었다. ‘빚내서 집 사라’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2%로 내렸다. 이자까지 줄어 대출 환경은 한층 ‘개선’됐다. 이런 정책에 부응하듯 2007년 665조원이던 가계부채는 지금 1040조원을 넘어섰다. 사상 최고 기록을 매달 갈아 치운다. ‘미친 전셋값, 빚으로 버틴다’ ‘가계부채 폭탄 돌리기’ 같은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이렇게 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다. 빚은 미래의 소득을 끌어다 쓰는 일이다. ‘내 벌이로 장차 이 정도는 갚을 수 있겠다’ 하면서 빌리는 게 상식적일 텐데, 정부는 ‘지금 빚을 내야 경제가 살아나 미래에 그만큼 소득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TV 대출광고부터 거시정책까지 빚을 권하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현금 주고 차 사는 저 친구의 고집은 ‘저항’에 가깝다. 문제는 누구나 그렇게 독해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가계부채 1040조원 가운데 320조원은 다중채무, 즉 ‘돌려 막는’ 빚이다. 빚을 눈덩이라 한 것만큼 적절한 비유도 드물다. 저 320조원을 빌려간 이들은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려고 카드사와 저축은행과 대부업체를 들락거리는 중이다. 그러다 기대했던 미래 소득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우리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수차례 겪으며 충분히 목격했다.

최 부총리는 최근 “가계부채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고 했다. 경제 전문가의 예리한 판단을 반박할 재주는 없지만 과연 그런지 의문을 접기 어려워 이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 그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일까.

삶이 짓눌려도 좌절하지 말아야

‘희망 만드는 사람들’은 빚에 짓눌린 이들에게 상담과 부채 관리를 해주는 사회적기업이다. 부채를 질병과 비교해 설명한다. “병이 생기는 원인은 잘못된 생활습관, 위생·건강관리 지식의 부족, 열악한 주변 환경, 갑작스러운 사고 등입니다. 빚이 생기는 원인은 잘못된 소비습관, 금융·신용관리 지식의 부족, 열악한 경제 환경, 갑작스러운 사고 등이죠. 뭔가 비슷하지 않나요?” 정부는 병의 예방과 치료에 앞장서지만 빚은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사람들은 병에 걸렸을 때 “내 탓이야” 하지 않지만 빚에 짓눌리면 죄의식에 자책하며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기어코 따먹은 아담의 후예다. 유혹에 취약한 DNA를 향해 대출광고를 폭탄처럼 퍼붓고 빚내라 등 떠미는 건, 환풍구를 2m 이상 높이지 않은 일보다 더 심각한 ‘안전불감증’일지도 모른다. 빚지지 말자. 그러나 어찌해서 빚을 지고 그 빚이 삶을 짓눌러도 좌절해 나와 가족을 포기하지는 말자. 그건 나만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 빚 권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는 그래야 한다.

태원준 사회부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