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원 (6) 30대에 기숙사 사감… 신앙을 군대식으로 훈련

입력 2014-11-12 03:25
서울신학대학 조교로 선발된 세 사람. 왼쪽부터 이용원 목사, 박장균 이정근 교수로 이들은 모두 일반대학을 나온 뒤 신대원을 졸업했다.

서울신학대학 기숙사 사감을 맡게 된 나는 아직 팔팔한 30대라 기숙사 학생들의 신앙을 군대식으로 훈련시켰다. 새벽기도회 후 전원 운동장에 모이게 해 국민보건체조를 하고 운동장도 몇 바퀴씩 돌게 한 뒤 식당으로 가도록 했다. 당연히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되었다.

그런데 저녁 외출을 나갔다 돌아오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학생들을 모아 놓고 몇 시까지 돌아오는 것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더니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밤 10시로 정했다. 못 지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때려도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난 정말 다음날부터 귀교시간을 어긴 학생들을 엎드리게 하고 엉덩이를 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의 유신체제 하에서는 가능했던 일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내게 엉덩이를 맞았던 신학생들은 지금 모두 60대 목회자가 되어 있다. 가끔 그들을 만나면 “그래도 엉덩이 맞을 때가 좋았다”고 말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당시 1970년대 대학은 정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대학교마다 데모가 한 창이었다. 나라의 문제도 컸지만 모두가 가난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신학교들에서도 데모를 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오히려 “이왕 데모하려면 다른 신학대학 학생들이 한 뒤에 하지 말고 먼저 하라”고 부추겼던 기억도 난다. 이때 내가 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에 가장 강조했던 내용은 ‘삯군 목사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러분, 목회를 직장과 직업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보따리를 싸기 바랍니다. 목회해서 큰 교회 세우고 잘먹고 잘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면 이런 사람도 보따리를 싸세요. 목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주어진 분량만큼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교회 세웠다고 칭찬하는 분이 아니고, 교회 재정이 넉넉하다고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들어온 성공지향주의 목회가 오히려 한국교회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주위에서 가끔 만류할 정도로 거침없이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어도 바른 목회를 하고 주의 종을 잘 키우는 데 일조하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리고 체부동교회에서 청소년부를 맡아 잘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청소년 부흥 집회를 가끔 나가곤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청소년들을 잘 이해해 주고 눈높이 설교를 한다는 평을 받았던 것 같다. 197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루는 한 여학생이 교수실로 날 찾아왔다.

“교수님, 저희 아버님이 인천소년교도소장이신데 한번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난 잘못한 것 없는데 왜 보자고 하시나.”

농담을 건네며 웃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 교도소를 가서 K소장을 만났다.

“교수님, 제가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곳에 와보니 교화를 위한 행정이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도움을 좀 주세요.”

한국에 소년원이 많지만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된 후 오는 소년교도소는 김천과 인천 두 곳에 있다고 했다. 이 중 초범은 김천에, 재범 이상은 인천으로 오는데 이곳에 13세부터 24세까지 죄수 1400명이 있다고 했다. 그중 여자는 200명 정도인데 이곳에서 매일 사건 사고가 난다고 했다. 통제가 너무 힘들어 고심하다 기독교인인 소장이 ‘청소년 부흥집회’를 잘한다는 나를 초청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교수님, 이 청소년들을 말씀으로 좀 교화시켜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외에 없습니다. 제가 모두 모이게 할테니 교도소 부흥회를 열어주세요.”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부흥회 날이 되어 인천소년교도소 대강당으로 들어간 순간, 난 내가 잘못 판단해 멋모르고 온 것임을 깨닫고 절절히 후회하게 되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