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초기의 평양 연합정신 계승해야”

입력 2014-11-11 02:18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평양지역 감리교의 역사와 한국교회’를 주제로 ‘2014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한국 초기 기독교 중심지였던 평양에서 교회의 연합과 지도자 양육에 힘썼던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며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북한교회연구원 유관지(사진) 원장은 주제발표에서 “1888년 봄 미국의 아펜젤러 선교사는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와 동행했고,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의 우애를 강조하며 ‘서울과 대구, 평양은 함께 일할 도시’라고 연설했다”며 “평양은 선교 초기부터 연합이 잘 이뤄진 곳”이라고 말했다.

유 원장은 “해방 후 문을 연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교육기관 사이에도 연합이 잘 이루어져 감리교 교역자가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했고, 장로교 목사가 성화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평양의 3·1운동과 의료선교, YMCA 등 기관에서도 기독교의 연합이 잘 이뤄졌는데 이는 평양이 한국 초기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소개했다.

‘성화신학교의 역사와 성화파의 활동’에 대해 소개한 고성은 목원대 박사는 “1946년 6월 북한에 성화신학교를 세운 배덕영은 사회주의 정권과의 마찰을 예상했지만 남쪽으로 가는 대신에 잔류를 선택했다”며 “북에서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그에게서 ‘순교적 신앙’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성화신학교는 교파를 초월해 몰려든 반공 기독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북한 정권에 ‘반공신학교’로 낙인 찍혔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2월 평양신학교와의 강제합병으로 폐교됐다.

고 박사는 “전쟁 이후 월남한 성화신학교 학생과 교수들은 동문회를 조직했고 교회도 설립했으며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 등 다양한 교파에서 활동하며 신실한 신앙인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