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필리핀 레이테주(州) 톨로사시(市) 한복판에 위치한 톨로사광장은 오전 6시쯤부터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나와 티셔츠를 나눠주는 부스 앞에 길게 줄을 섰다. 한국기아대책이 개최한 마라톤 대회 ‘거북이 마라톤’에 참가한 학생들이었다.
이날은 필리핀 사상 최악의 태풍인 하이옌이 톨로사와 타클로반 등 필리핀 중부지역을 강타한 지 1년째가 된 날이었다. 1년 전 이곳에선 태풍으로 7000명 넘는 사람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파손된 가옥은 120만채가 넘었다. 농경지 대부분은 쑥대밭이 됐으며 400만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예샤 포티카노(11)양은 “너무 무서워 부모님 품에 안겨 밤새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슬픈 표정으로 그날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늘은 19세였던 이모가 세상을 떠난 날이에요. 1년 전 이모는 시장에 갔다 강풍에 떨어진 무언가에 가슴을 맞아 숨졌어요. 저희 가족은 해일과 폭우를 피해 체육관으로 피신해 며칠을 보냈어요.”
마라톤 출발 시간인 오전 7시가 가까워지자 포티카노양을 비롯한 아이들 700여명은 출발선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입은 티셔츠엔 대회 슬로건인 ‘즐겁게 걷고 뛰자’는 뜻의 ‘펀 런 앤드 워크(Fun Run & Walk)’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한국기아대책 관계자가 ‘스타트’를 외치자 아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북이 마라톤의 코스 길이는 겨우 3㎞에 불과했다. 대회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천천히 걸어도 상관없는 대회였다. 등수 역시 없었다. 일부 아이들은 부모님, 혹은 학교 선생님과 함께 하이옌 참사로 세상을 뜬 친구나 가족, 이웃을 추모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톨로사의 한 초등학교 보건교사인 세실 아보크(44·여)씨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귀띔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태풍으로 희생돼 살아남은 아이들도 큰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어린 나이에 보아선 안 될 장면을 너무 많이 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기아대책이 거북이 마라톤 행사를 연 것은 아이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단체는 태풍 발생 직후 국내 NGO 중 가장 먼저 이곳으로 달려와 구호활동을 벌였고 생존자들의 심리적 불안을 치료하기 위해 다양한 ‘정서 케어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마라톤 대회를 총괄한 인물은 한국기아대책의 기아봉사단원 강병기(41) 선교사였다.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에서 사역하던 강 선교사는 참사 직후인 지난해 11월 14일 피해 지역을 처음 찾았다. 그는 지난 1년간 이곳 사람들의 아픔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며 이들과 함께했다. "톨로사에 처음 왔을 땐 정말 참혹했습니다. 구호활동에 참가하며 마음속으로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시옵소서'로 시작하는 찬송을 매일 불렀지요. 1년이 지났지만 사람들 마음속 상처는 여전합니다. 복구가 필요한 곳도 많고요. 한국교회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
톨로사(필리핀)=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필리핀 태풍 피해 1년… 기아대책 ‘거북이 마라톤’ 개최
입력 2014-11-11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