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전시관 채운 아르헨 작가의 낙천성…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레안드로 에를리치展

입력 2014-11-11 02:47
아르헨티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설치 작품 ‘대척점의 항구’.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레안드로 에를리치
요트 몇 척이 항구에 정박해 있다. 노랑, 초록, 파랑의 경쾌한 배들. 그게 바다에 비친 모습을 표현한 거로군. 그런데 너무 빤하다. 가로등이 비친 모습은 거꾸로 구불구불 매달린 또 하나의 가로등으로 표현한 게 전부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로비에 들어서면 지상 3층 지하 3층을 통째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든 거대한 전시장(23 ×23 ×17m)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스케일의 전시공간은 없다. ‘서울박스’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설치 작품 ‘대척점의 항구(Port of Reflections)’는 이렇게 눈속임 같지 않은 눈속임으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개관 1년째를 맞은 서울관의 ‘서울박스’를 서도호에 이어 두 번째 차지한 주인공은 아르헨티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41·사진). 일찌감치 28세 때인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작가로 선정됐던 아르헨티나의 대표 선수다. 그는 최근 가진 인터뷰에서 “전시공간의 크기를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무한한 양의 물감, 무한한 크기의 캔버스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 공간의 특성을 살려 제작에 9개월, 현장 설치에만 1개월이 걸려 내놓은 작품은 배를 매개로 했다. “서울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구의 양극단에 있습니다. 배라는 것, 그것이 정박한 항구라는 것은 교류를 상징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어가자는 표상이지요.”

그렇다면 왜 ‘반영(Reflections)’일까. 그는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굉장히 찰나적이다. 한시성과 덧없음을 시적으로 접근하고 제 작품을 통해서 포착하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높은 천장을 그는 어떻게 요리했을까. 공간의 이점을 살려 몇 군데 관람 포인트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우선 1층에선 다리 위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바다 밑에서 그 항구를 올려다보는 착시를 일으킨다. 사방의 바닥과 벽이 검게 도배된 공간은 마치 관객이 심해 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서울관을 빠져나간 뒤 뒤편 종친부 언덕으로 가보자. 거기서 건물에 난 창으로 들여다볼 때의 작품 이미지야말로 다른 전시장에서는 만날 수 없는 묘미다.

정교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착시의 테크닉이 오히려 낯설다. 그는 “작품을 보면 실제 물그림자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기만하지 않고 어떻게 구현했는지 다 드러낸다”며 “관객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게 내겐 중요하다. 그런 시적 이미지를 만들며 내가 느낀 영감과 행복을 관람객이 공감했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했다. 남미인의 낙천성이 묻어나는 전시다. 내년 9월 13일까지(02-3701-9500).

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