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강요하는 ‘열정 페이(열정 있으니 적은 월급은 감수하라)’에 뿔난 청춘들

입력 2014-11-10 03:16 수정 2014-11-10 08:56
눈물을 흘리는 모습의 가면을 쓴 ‘청년유니온’ 회원들이 9일 서울 세종문회회관 앞에서 청년을 착취하고 비합리적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에 맞서 ‘블랙기업 운동’을 시작한다며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청년유니온은 온라인 제보 사이트를 개설해 블랙기업의 행태를 폭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블랙기업 개념을 만들어낸 일본 청년단체 ‘포세(POSSE)’ 회원들도 이날 회견에 참여했다. 연합뉴스
장모(25)씨는 올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간 한 복지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시작할 때 정규직 전환에 대한 공지는 없었지만 직원들은 “일하는 걸 보고 정규직에 뽑을지 결정한다”고 귀띔했다.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됐다. 장씨를 포함한 인턴 5명은 야근을 불사했고 직원들은 경쟁을 붙였다. 뒤에서 “누가 잘하더라”고 말을 흘릴 때마다 가슴이 타들어갔다.

장씨는 9일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선배들 눈치 보며 시중드느라 바빴다”고 했다. 인턴 월급 120만원으로 선배들에게 담배도 사다 바쳤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4개월 뒤 2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장씨 이름은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인턴을 채용할 때 최소한 정규직 전환 여부나 기준을 알려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희롱하는 정책은 사라져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열정 페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에 입문하는 일자리는 대개 인턴이나 비정규직 또는 자원봉사 수준인 경우가 많다. 당연히 보수도 적다. 이런 현실을 가리켜 “너희는 ‘열정’이 있으니 쥐꼬리 ‘페이’(pay·봉급)쯤은 감수하라”는 식이라고 비꼬는 말이 ‘열정 페이’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그래, 그 열정을 높이 사마. 대신 돈은 적게 준다” 하면서 이 사회가 이용해 먹는다는 냉소가 담겨 있다.

정모(30)씨는 지난해 봄 매출 1조원이 넘는 자원회사 전략팀에 입사했다. 선배로부터 “해외 자원회사 동향을 내일까지 분석하라”는 지시와 함께 1000쪽에 이르는 자료를 받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정씨는 밤을 새워 방대한 자료와 씨름했다. 다음날 선배는 “이게 뭐냐”며 호통을 치고 머리를 때리더니 “너 말고도 이 회사 들어오려는 사람은 널렸으니까 힘들면 나가”라고 소리쳤다. 정씨는 “내가 정규직으로 입사했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시키진 않았을 것”이라며 “‘사수’라 불리는 이 선배 말고는 일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서 비인간적 대우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기성세대는 “요즘 애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젊은이들도 할 말이 많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정규직 일자리는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에서 언제까지 헝그리 정신만 발휘하라는 거냐고 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공공기관에서 뽑은 청년인턴 8000여명 중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은 1815명(23%)에 불과했다. 대한지적공사는 인턴의 정규직 전환율이 8%에 그쳤다.

민간기업은 공기업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정규직이 될 확률은 50%에 못 미친다. 2012년 인턴제도를 운영하는 375개 기업을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조사한 결과 인턴의 정규직 전환율은 47.7%였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인턴이 정규직 될 확률은 절반 정도다. 올해도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전문직에도 ‘열정 페이’는 만연해 있다. 최근에는 유명 디자이너 사무실의 박봉이 문제가 됐다. 야근수당을 포함해 견습은 월 10만원, 인턴은 월 30만원, 정직원은 월 130만원을 받았다. 최저임금(올해 시급 5210원, 내년 5580원)에도 못 미치는 돈이다.

지난 9월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자원봉사자에 대한 비정상적 처우가 폭로됐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이 없어 굶는 경우가 허다했고, 식비와 교통비마저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 결국 자원봉사자들이 무단이탈하는 일까지 빚어졌다. 모두 “하고 싶은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러 온 걸 테니 이 정도는 감수하라”는 암묵적인 ‘룰’ 탓에 벌어진 일이다.

열정 페이는 기성세대와 젊은층의 충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1980∼90년대는 성장이란 목표 아래 회사에 모든 것을 ‘올인’하던 때다. 이런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그렇게 올인할 기회조차 얻기 힘든 요즘 젊은층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조리한 관행이나 조직문화도 헝그리 정신의 산물로 여겼던 기성세대가 지금도 같은 사고를 고수한다면 청년세대와 문화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면서 “헝그리 정신으로 버티면 뭔가 기대할 수 있었던 시대와 출발부터 모든 게 불확실한 시대, 두 시대의 충돌이 열정 페이란 말을 빚어낸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